과목: 예배학
                                                 퀸즈 신학 대학     교수: 이상조목사
예배학(禮拜學. 영:Liturgics, Liturgiology. 독:Liturgiewissenschaft)

   예배학은 실천신학의 한 분과로서 일명  "전례학"이라고도 부릅니다.  예배, 전례, 의식 등의 원리와 방법에 관학 학문입니다.  예배학의 대상이 되는 연구 영역은 예배의 역사와 원리가 중심이 됩니다.  각종의 기도서, 식문, 전례서 등의 각 문서를 연구하며, 각종 의식, 성서일과, 교회력의 연구가 필요하고, 더욱이 교회음악, 장식, 교회건축, 기타의 부수적이며 실제적인 연구를 수반합니다. 예배학이 학문적인 원리와 조직을 정비한 것은 19세기입니다. 그러나 예배학적인 원리나 실제문제를 논한 기도서 등의 문헌은 이미 옛부터 있었습니다. 특히 초기에서 중세기에 이르는 시기는 그리스도 교회의 예배, 제의식, 습관의 형성기였고, 로마 정식서(定式書), 기타 중요한 문헌을 남겨주고 있습니다. 종교개혁기에는 학문으로서의 예배학은 형성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종교개혁은 로마 교회의 성찬관에 대한 비판이었고 설교의 의의를 재발견하여 교회의 권위를 바르게 인식하는데 있었습니다. 그러한 원리와 실천적 의견에 치중한 성찬론, 기타의 신학 논문, 신앙고백서, 교회규정, 또는 여러 가지 찬송가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예배학에 관한 강의는 17세기에 들어가서 시작되었는데, 최초의 학문적인 예배학 서적으로서는 프리드리키(J. Friedrici)의 "Liturgia vetus et nova"(1704-05)였습니다. 그후 직접 실천신학의 개론적 서술 가운데서 취급하게 되었습니다. 19세기에 들어와서 현재의 "예전운동"의 선구라고 볼 수 있는 예배개혁운동이 일어났고, 또한 예배학적인 역사 연구가 진행을 보았습니다. 20세기, 특히 제 1차 대전후, 예배학 연구는 활기를 띠웠습니다. 그 이유로서 각교파내에서 예배 개혁운동이 겨우 결실을 보았고, 세계 교회운동에 있어서 교회일치의 신학적 기본 연구의 일환으로서 예배학 연구가 이루어진 점, 그리고 바르트의 하나님의 말씀 신학이 설교, 교회, 예배 등의 신학적인 근본적 반성을 요구한 점, 더 나아가서는 신학 성서학이 초기 교회의 예배에 관한 연구를 시

작한 점을 들 수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아울러 로마 교회도 포함하여 교회 혁신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예배 자체의 혁신을 목표하고 있는 것이 현재 예배학의 향방이라고 보겠습니다.

이번 학기에서 연구하고자 하는 예배학의 분야는:
1. 예배의 본질은 무엇인가?
2. 예배의 정의와 표현은 무엇인가?
3. 예배의 역사에 대하여.
 1). 구약의 예배 역사 / 2). 신약의 예배 역사 / 3). 속사도 이후의 예배 역사 / 4). 교부     시대의 예배 역사 / 5). 중세시대의 예배 역사 / 6). 근대시대의 예배 역사 / 7). 현대의     예배
4. 개혁파 교회의 예배에 대하여.
 1). 예배의 의의 / 2). 예배의 기본 원리 / 4). 삼위일체 중심의 예배 / 5). 자유적 예배 /
 6). 공동적 예배 / 7). 조화적 예배
5. 예배의 요소와 순서
6. 성례식 예배
7. 교회력의 예배 등에 대하여 연구하도록 하겠습니다.

예배학 강의(禮拜學 講義)
목적: 예배학은 성경 어디에서도 정확하게 예배학을 정의하면서 가르쳐 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성경에서 가르쳐 주는 예배의 기본 목적과 방법을 근거로 예배의 역사가 이루어져 왔음을 알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 이번 학기를 통하여 공부하며 연구하고자 하는 것은 성경안에서 예배의 역사를 찾아내고 지금까지 지켜 내려온 예배의 모형이나 방법을 연구하고 또 발견해 냄으로서 우리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예배의 방법을 찾아내고 그것을 체계적으로 학문화 하고 실천하여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방법대로 예배를 올려 드리는 것입니다.

* 예배의 본질: 예배는 창조주 하나님께 경배하고 영광을 돌리는 신자의 자발적인 행위입니다(시 96:7-8).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자신의 뜻을 계시하셨고 인류에 대한 사랑을 나태내셨습니다.  그러므로 예배는 하나님의 본성(本性. nature)과 행위(行爲.action)에 대한 인간의 응답(response)입니다(엘렌케이). 즉 예배는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나타내신 하나님의 계시와 응답입니다(폴훈).  계시와 응답으로서의 예배는 말씀을 통한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대화요, 그리스도의 사제적 행동과 신비스러운 제의적 중재를 통한 교제이며, 그리스도의 은혜에 힘입어 드리는 자기 헌신적 응답입니다.  제임스 화이트(James White) 박사는 예배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를 통하여 하나님을 알게 되고, 이 앎에 따라 응답함으로써 가장 심오한 경지에서 실재(reality)에 접근하려는 신중한 행동입니다."
  여기서 그는 하나님을 아는 것과 이해하는 것이  예배를 향하는 길임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이 앎과 이해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명백해진다고 봅니다.  동시에 이 명백한 앎과 인지는 그리스도를 궁극적으로 만나게 해주는 통로인 동시에 피조물로 하여금 창조주께 응답하도록 일깨워 주는 동력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계시와 은총을 확신하는 신앙인은 예배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알게 됩니다.  예배의 본질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경배하는 일'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경외하고 높이며 찬양을 드리면서 자랑스럽게 여기는 일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를 찬양한다는 사실 속에는 우리가 하나님께 존경과 사랑과 영광을 돌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깊은 의도가 내표되어 있습니다. 예배는 한마음으로 형식을 갖추어 하나님을 축하하는 일입니다.  이렇게 경배와 축하를 바탕으로 하는 예배는 신자의 성숙을 위해 큰 도움을 줍니다.  왜냐하

면 예배는 삶 전체를 하나님께 바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배를 드리는 일은 우리의 더 훌륭한 삶을 위하여 하나님께  우리 존재를 의탁하는 일입니다.  예배를 드리는 것은 우리의 몸과 마음을 하나로 묶어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가려는 움직임이며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는 우리의 몸을 하나님의 성전이 되게 하고 우리의 영을 성령으로 새롭게 하며, 우리의 마음을 예수님의 마음처럼 되게 하고 우리의 뜻을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도록 이끌어 줍니다.   이러한 중요한 요소들이 조화를 이루어 의미 있는 예배를 드릴 때 전인적인 구원과 치유와 온전함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 귀중한 예배는 예전(Liturgy)과 매일 생활의 봉사를 통하여 드려져야 할 '백성들의 고귀한 엄무'이기도 합니다.  이는 예배를 뜻하는 헬라어 '                   '(레이투르기아)에서 잘 나타납니다.  이 용어가 이스라엘 사람들의 생활에서는 '백성에 대한 봉사' 혹은 '국가에 대한 봉사'의 뜻으로 쓰이지만, 성경에서는 '하나님께 드리는 경건한 봉사'와 아울러 '공동체에 대한 봉사'의 의미를 갖습니다.  보다 신학적인 의미로는 만인 사제의 신앙을 바탕으로 하여 모든 기도교인이 사랑의 공동체를 수립해 나가는 전체 생활을 말합니다. 이 공동체, 즉 교회는 예배적 삶을 향하여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참여하고 하나님께 자신을 바치는 것(self-offering)을 특징으로 삼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계시하신 창조주이시요, 섭리자이시며 구원자이신 하나님을 분명히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사랑과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주신,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또한 성령의 감화와 역사하심을 도움을 받아 화해와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자발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동리는 공동적이고도 의식적인 응답이요 또한 전존재와 전삶을 봉사하는 행위입니다." 이처럼 예배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성

도의 자발적인 행위입니다.
 예배란 정규적인 예배를 검토하고 지도하여 가능한 한 본연의 예배에 가깝게 접근시키는 실천적, 실제적 성격이 강한 학문 체계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벡만(J. Beckman)과 한(W. Hahn)은  말하기를 , "예배는 그 본질에 있어서 전문가들에 의해서 그려진 신학적인 청사진이 아니라 하나의 사건이며 말씀과 성례전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을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그의 백성들과 만나는 만남입니다. 그러므로 그 예배의 형태는 믿음과 복종의 열배인 것입니다.  그리고 예배학은 역사적으로 당연시 되어온 기독교 예배(cult)를 검토하고 평가하는 비판적인 규범을 마련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실제로 예배(liturgy)에 있어서의 과정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교회가 예배에서 따라야 할 적절한 순서를 마련하고 예배를 견지하도록 지지하는 것입니다"(J. Beckman & W. Hahn, Worship and Congregation, Geoffrey Buwell Richimond : John Knox Press, 1963).   기독교 예배의 역사는 인간이 범죄하여 타락하기 전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과 인간과의 교제를 통한 예배가 그 시초하 할 수 있습니다.  이때에 하나님과 인간과의 종교적 교제는 창조에 기초한 자연적 관계라기 보다는 하나님의 자유 의지에 기초한 인격적 계약 관계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과의 계약을 지키는 자에게 영원한 생명을 부여하는 교제를 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영원한 생명이 부여된 교제는 인간이 범죄함으로 끊어져 버렸습니다.  그리하여 인간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대화가 단절되어 버렸고, 인간 단독의 힘으로는 도저히 하나님을 만날 수도 없게 되었으며 가까이 할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께 향한 친밀한 교제에 의한 예배 행위를 상실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한 죄의 결과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속의 역사를 이

룩하셨습니다.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사역은 죄인으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께 경배드리는 것을 가능하게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보혈로 인간의 죄를 씻어 버리시고,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 앞에 나아오게 하셨습니다. 그는 그의 백성들이 자신의 축복을 받을 수 있게 해 주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에 예배는 그 본질에 있어서, 하나님이 세상에서 자기 백성을 부르신 회중의 자화상입니다. 사실 예배는 교회를 교회되게 할 수 있는 하나님으로부터의 능력인 것입니다.  이러한 예배가 되려면,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존재와 임재와 사랑의 축복을 믿음으로 응답하고 생활로써 실천하며 봉사와 헌신의 행위가 있어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기독교 예배의 본질이요 핵심인 것입니다.  성경에서 기독교 공예배는 "하나님의 성전", "하나님의 집"에서 행해진 예배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예배의 본질은 "은혜의 계약에 기초한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에 의한 하나님과 인간과의 사귀고 또한 만난다"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죄를 범하여 타락하기 이전, 낙원에 대해서도, 하나님과 사람과의 사귐의 종교, 즉 예배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에 있어서도 신인(神人)과의 영교에 기초가 창조주가 피조물이란 관계에 머물지 않고, 하나님께서 사람에 대해 성립된 게약에 근거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간과의 종교적 교제는 창조에 기초한 자연적 관계가 아니과 항상 하나님의 자유스러운 의지에 근거한 인격적 계약관계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과의 계약을 지키는 것에 영원한 생명을 부여한다는 교통함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범죄한 이후, 죄인 그 자체를 가지고 거룩한 하나님 앞에 서서 하나님과 가까히 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죄인이 하나님 앞에 서서 하나님과 가까이 사귈 수 있는 길은 오로지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하심에서 성취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의 피에 의해 대속할 하나님의 백성 중에서 특별계시적으로 임

재하시고, 그것에 의해서 축복을 내리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임재와 축복에 대해서 신앙을 가지고 응답하여 봉사한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예배의 본질입니다.  예배의 본질은 구약에서는  상징적, 가시적으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구약의 예배는  장막 곧, 성전에서 드리는 것이지만 장막은 하나님께서 그 백성 중에 거주한다는 상징인 것입니다(출 25:8, 22, 29:42-45, 민 17:4).  장막은 '회집의 장막'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이것은 하나님께서 임재하시어 자기 백성과 회견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시 42:1-4, 시 63:1-3). 성막(성전)의 구조가 이 진리를 가견적으로 보이고 있습니다. 성막은 지성소와 성소로 되어 있습니다. 두 성소 사이는 휘장이 있습니다(사 6:1-5, 히 9:3-8, 출 25:10).  지성소에는 돌비에 새긴 언약궤가 있었습니다. 여기는 의(義)로서 거룩한 하난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여기는 대제사장이 1년에 1회씩 속죄일에 대제사장과 백성들의 죄를 대속하려고 들어가는 성소입니다. 지성소앞에는 휘장을 건너서 성소가 있습니다. 성소에는 제단에 죄를 위해 희생제물을 드리므로 정결해진 백성 대신에, 제사장이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곳입니다. 휘장 가장 가까운 곳에는 향단이 있어서 제사장이 밤낮 꺼지지 않고 피우도록 봉사하였습니다. 향기는 기도의 상징으로서 가장 순수한 예배 행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백성들의 죄를 대속함이 없이는 하나님을 예배하며,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없는 것입니다. 지성소와 성소와의 두 부분으로 성막이 되어 있다는 이것은 하나님과 백성들과의 두 집이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이 성막 전체가 하나님의 집으로서 백성들이 하나님의 집에 들어가 하나님의 임재를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우러러 보는 것입니다(시 15:1, 시 24:3, 시 27:4-6). 여기에 그리스도의 본질이 있습니다.  성경적 종교의 본질로서 "하나님과 사람"이 더불어 같이 있다라는 은혜스러운 진리가 구약시대에 있었던 것과 같이 성막과

 성전 예배에서 계시되어 있는 것이지만 이것은 임마누엘, 예수 그리스도 인하여 성취된 것입니다(사 7:14, 마 1:23, 요 1:14).  성막(성전)이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었던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십자가의 공로에 의하여 대속된 것으로, 부활함으로써 구약의 성전이 그 사명을 종결시키는 것입니다(요 2:19-22, 막 14:58).  구약시대에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로서의 성전에서 드리는 예배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이후 그리스도의 부활된 몸에서 행해진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가 "하나님의 성전"(고전 3:16),  "성령의 전"(고전 6:19), "하나님의 집"(딤전 3:15)입니다.  "진실로 하나님께서 여러분 중에 계시는"(고전 14:25) 곳입니다.  교회 즉 하나님의 백성들과의 사귐 중에 하나님과 성령,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임재하게 되어 백성들의 봉사로서 그곳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구약시대의 성전예배와 전적으로 동일한 영적 진리를 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역시 세상종말에 완성된 하나님 나라의 모형으로서 종말적 의의를 가지고 잇습니다.  기독교인이 잠시도 망각할 수 없는 천국이란 어떤 곳에서 이루워지겠는가? 그것은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서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 21:3-4)하는 곳입니다.  천국이란 곳은 하나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계시는 곳입니다.  기독교인이 그것을 우러러 보고 머물러 있는 곳이지만, 그것이 또한 현재 이 지상에서도 앞서 선취하여 맛보게 허락되고 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의 그림자입니다. 그리고 교회에서 드리고 있는 예배야 말로 지상에서 가장 선명한 하나님 나라의 모습인 것입니다.  예배에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중에 임재하시는 것

이고, 하나님의 백성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하나님의 양자로서 부름을 받아 하나님 나라의 축복을 받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예배에서의 하나님의 임재가 하나님의 편재와도 구별된 특별계시에 의해서 임재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그리스도의 임재나 조금도 다름이 없습니다. 주의 임재가 성령과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임재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의 설교와 성찬식에서 매우 분명하게 표시되는 것입니다.  예배의 최고정점으로서 지키고 있는 성찬식이 2세기경에는 보다 멀리 하나님의 말씀에서 거리가 멀어져 의식화, 매신화 되어 버린 것이지만 종교개혁은 교회개혁의 거점을 예배개혁으소서 촉진하여 한번 더 말씀의 중심을 부흥시킨 것입니다.   예배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사람과의 회견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두 종류의 요소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편에 보는 부분이라 부르고 있어 성경봉독, 설교, 예식, 기도로서 하나님께서 백성이 있는 곳에 오신다는 말씀입니다.  둘째는 교회측에서 보는 부분으로 기도, 찬양, 헌금 등으로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나와서와 그 은혜에 보답해 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회중은 두 방법으로 하나님께 예배하기 때문입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으로 수용적이고 다른 편은 하나님의 말씀에 응답하는데 있는 것입니다. 예배에 출석하는 것은 신앙 강화를 듣고 신앙감정의 만족을 위한 것은 아닙니다.  교회의 예배에는 하나님께서 영적으로 임재하셔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배에서 신앙에 의한 전체적 참여가 요구되는 것입니다.


1. 예배의 정의와 표현:  
 1). 정의:  기독교에 있어서 예배의 정의(定議)를 한마디로 말하기는 쉽지가 않습니다. 사도바울은 "내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가졌으니 사람이 실제로 말못할 경험이로다"라고 하였습니다(고후 12:3-4). 예배의 경험은 개인적인 것이 있는 반면에, 사람들이 함께 예배 드릴 때 영혼의 통일과 이해의 통일을 맛보는 공통적이고도 대중적인 면이 있기 마련입니다. 예배는 생명있는 종교가 가지는 유일하고 충분한 증거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예배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중보로 하여 하나님과 사람, 곧 예배자와의 교제(communication) 혹은  만남(meeting)의 징표가 되는 것입니다." 루터는 예배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만일 그대가 하나님을 모시고 있다면 그대는 마땅히 그에게 예배하여야 한다(Habere Deum est colere Deum)." 또한 헉스터블(John Huxtable)도 역시 "기독교 예배는 하나님과 그의 백성의 대화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성경에서는 기독교의 공적인 예배를 "하나님의 전", "하나님의 집"에서 거행되는 예식을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예배의 정의는 이사야 42장 8절을 중심으로 두고 있습니다. "나는 여호와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니라." 예배의 본질에 대한 정의를 꼭 한 마디로 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예배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대한 경배"임은 틀림없으나 각 교파마다 예배에 대한 관점과 그 강조점이 조금씩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신학자들은 예배의 본질을 철저하게 하나님 편에, 또 어떤이들은 예배자들인 성도 편에 중점을 두고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하여 예배를 명령하셨음을 기억해야 합니다(대상. 16:29). 또 오늘 본문 이사야 42장 8절에서도 하나님께서는 본질적으로 인간들에게 예배받기를 원하시는 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예배란 하나님의 온갖 축복을 얻을 수 있는 '영적 통로'라 할 수 있습니다.
   예배의 정의는 세 가지로 나눌 수가 있는데 첫 번째는 하나님과 만남입니다(잠 8:17).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라." 한마디로 말해서 예배란 하나님과 인간과의 만남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만이, 또는 인간만이 중심이 된다면 예배가 성립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과의 만남"이라는 단어를 "하나님과 사귐"(요일 1:3, 6)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예배란 하나님과 인간과의 사귐이요 교제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만남에는 몇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1)"하나님의 계시"입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려면 먼저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하나님의 존재와 그 뜻을 나타내 알려주셔야 가능합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나를 찾으라, 만나라"(잠 8:17)고 명령하셨기 때문에, 유한하고 죄인된 인생들에게 만날 수 있는 그 길을 제시해 주셔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바로 "성경"을 통해서 그 만남의 길을 제시해 주셨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인된 인류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자격"을 마련해 주셨습니다(빌 2:10-11. 히 11:20). 그러므로 예배의 창시자, 예배의 주인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이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2) "예배자의 믿음"입니다(히 11:4). 이제 인간은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존재와 그 거룩한 성품을 알 수 있게 되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은혜를 믿음으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계시된 하나님의 은총을 신앙하는 성도들만이 비로소 하나님에게 예배자로 그 자격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감을 얻느니라."(엡 3:12).   (3)"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인 예배는 반드시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자격을 갖추었다 하더라도 우리가 우리의 마음대로 무법적으로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아버지께서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지니라"(요 4:24)고 하셨는데 "신령"은 "성령안에서", "진정"은 "진실한 마음으로"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성령님은 성도들을 통하여 교회에 예배의 모범을 제정해 놓으셨으며, 우리는 그 모범을 따라(고전 14:33,40) 성령님의 감동하심에 순종해야 하나님과의 참된 만남의 예배를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표현입니다(시 138:2). "내가 주의 성전을 향하여 경배하며 주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을 인하여 주의 이름에 감사하오리니." 또 어떤 이들은 예배를 하나님의 은총과 주권과 권세에 대한 "인간의 응답"이라고 정의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예배를 "하나님을 시인하는 행위", "하나님의 뜻에 대한 응답" 또는 "하나님의 구속 은혜 안에서의 경축"이라고 정의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로버트 지 레이번(Robert G. Rayburn)이라는 신학자는 예배를 정의하기를 "예배는 신자의 새 생명의 활동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에 나타난 하나님의 충만하심과 그분의 강력한 구속 은혜에 대해 성도가 영광, 존귀, 순종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즉  하나님의 구속 은혜에 대한 순종을 말하고 있습니다(삼상 15:22).  그럼 하나님께 대하여 감사해야 할 이유가 한정이 없지만 구체적으로 이런 것들이 있을 것입니다. (1) 그리스도의 은사를 인하여(고후 9:15), (2) 여호와의 선하심과 인자하심 때문에(시 136:1-2), (3) 우리에게 승리할 수 있도록 하시기 때문에(고전 15:57), (4)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에서 해방될수 있기 때문에(롬 7:23-25).  감사할 수 있는 시기에 있어서도 (1) 항상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살전 1:2), (2) 범사에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엡 5:20), (3) 일을 시작할 때와 마칠 때도 있습니다(요 11:41

), (4) 핍박을 받을 때도 감사해야 합니다(마 5:11-12).  감사하는 방법도 말할 수 있습니다. (1)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롬 1:8), (2) 제사를 통하여(시 50:14), (3)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엡 5:19-20), (4) 공의를 행함으로(마 6:8), (5) 인자를 사랑함으로(마 6:8), (6) 기도와 간구함으로(빌 4:6), (7) 우리 성도의 선한 생활로(롬 14:6), 그리고 (8) 물질로도 감사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고후 9:11).    세 번째는 하나님께 드려지는 산제물입니다(롬12:1). "그러므로 현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어떤 학자는 예배를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라고 정의하기도 합니다. 쥴리우스 멜톤(Julius Melton)이라는 신학자는 "예배는 그리스도인의 생활 전부와 전시간을 드리는 것"이라고 정의하기도 했습니다. 즉 우리 성도들이 전인적(全人的)으로 온 삶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예배라는 견해입니다.  이는 구약 교회에서 제사장들을 통하여 희생제물로 제사를 드리던 예배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습니다.  또 그리스도를 처름 예배했던 동방 박사들도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드리면서 '아기 예수께 경배'(마 2:11)했다고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예배 형태는 신약시대에 그리스도의 대속 은총 안에 거하는 성도들의 "영적 예배"의 모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의 공적예배(公的禮拜) 때에 물질로 헌물을 그려야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먼저 "나 자신"부터 하나님과 그 뜻에 온전히 드리는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대속 은혜를 의지하는 믿음과 감사와 그리고 의심 없는 순종심으로 드리는 예배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영적 제사요 예배입니다.  유대교에서도, 마호멧교에서도 엄청난 제물과 정성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지만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먼저 성도의 마음과 몸을

진리의 제단에 헌신하는 예배만이 영적 제사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롬 8:3-9).  즉 성도는 믿음 안에서 몸과 마음을 헌신해야 합니다. 예배의 정의에 이사야 42:8절의 "내 영광"은 히브리어로 케보디(        )는 '계시(manification)'라는 말과 '고귀한 것, 값진 것'이란 뜻을 같이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영광을 다른 이에게 주시지 않았다는 말은, 곧 자신의 고귀한 것, 자신의 나타내심(계시)을 다른 이들에게는 주시지 않았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자신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신다는 강한 뜻이 여기에 흐르고 있었습니다. 자신을 영화롭게 하는 자신의 종에게 이르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내 찬송"도 히브리어로 테힐라티(         )의 찬송의 주체가 하나님 자신이심을 '찬송'이란 말 히브리어로 테할라트(         ) 뒤의 요드(      )에서 알수 있다.  인간을 지으시고 그 환경을 종성하시는 이가 하나님이시며, 생명의 주관과 유지도 하나님으로 말미암는다.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시어 죄인된 보편 인간을 구하시고자 계획하신 이도 하나님이시며, 장차의 영광된 나라로 이끄실 이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인간과 모든 피조물의 찬양 주체가 되기에 합당하시며 피조물들을 당연히 여호와 하나님께 찬송을 드려야 합니다.  그러므로 예배는 구원 받은 자가 분명히 드려야할 의무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우리를 택하여 주셨고(살후 2:13), 또한 성령께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셨으며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셨고(살후 2:13),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은혜에 들어가게 하셨고(살후 3:5),  영원한 위로와 좋은 소망을 은혜로 주셨기 때문에(살후 2:16) 반드시 구원을 받은 성도는 예배를 드려야 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예배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요(행 5:290, 하나님과의 교제하는 것이요(요일 1:3),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의 은혜에 참여하는 것(빌 1:7)입

니다.
 2). 표현:  벨하우젠(Julius Wellhausen)은 예배가 신앙의 필요불가결한 표현이라면, 어떤 방법으로 하나님의 절대적 가치를 인정하는 표현을 할 것인가라고 하는 문제가 생긴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본질적으로 가치(worth)를 표현할 때에 헌물(offering)이라는 방법을 사용한다고 말하였습니다.  예배하는 자가 하나님께 돌리는 무한하고 절대적인 가치(worth)도 본질적으로 같은 방법, 즉 성도가 하나님께 드리는 헌물(offering)을 통하여 표현될 수 있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 예물을 가지고 그 궁전에 들어갈 지어다"(시편 96:8)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헌물이란 우리 자신의 전체를 우리의 지성, 감성, 태도 그리고 우리의 소유를 하나님께 바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외적 예물은 우리 내적 헌신의 결과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헌물의 가장 고귀한 표현은 '자기 자신을 바치는 것', 곧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롬 12:1) 드리는 것입니다.  신학자 코핀(Coffin)은 "우리는 우리에게 소중한 자들을 위하여 우리의 나라와 우리의 세계를 위하여, 우리의 사상과 우리의 참회와 우리의 감사와 우리의 큰 뜻을 그분(하나님)께 바친다.  우리 자신은 그가 찾으시는 예물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성육신적 개념으로써 하나님을 주체로하는 예배의 성격은 그리스도의 사건의 생생한 회고일 뿐아니라, 지금 현대의 하나님의 경험과 미래의 소망를 가지게 되는 그리스도인과 기독교 공동체의 근본적 변화가 촉구되는 예배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회중은 예배 행위를 통하여 살아계신 하나님과 만날 수 있고, 또한 그 예배는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본질적 요소가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예배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를 기초로 하여 되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는 하나님과 인간 개인 사이의 관계이기 전에 하나님과 세계의

 관계를 축하하는 공동적 행위입니다.  그리고 그 축하 행위는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역사를 참여하도록 부르는 초대인 것입니다.  오늘날 복잡해지는 현대사회에서 예배의 형식을 새롭게 하고, 예배의 참된 의의를 성경안에서 재 개발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배가 하나의 형태와 의식에 얽매이게 될 때에 진정한 의미의 예배를 상실하게 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배당을 중심으로 한 집중적인 예배를 토대로하여, 각 가정과 직장으로 분산되고 확산되는 예배 형태를 취할 필요가 있으며, 그를 통하여 보다 적극적인 전도의 역할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2. 예배의 역사:
        참다운 예배의 실상을 이해 하려면 우리는 예배의 지나온 발다취인 역사를 연구함으로써 예배의참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예배를 보다 생명력있게 만들 수 있는 자원을 발견할 수 있는 길은 예배에 관한 역사적 고찰입니다. 또한 지나온 교회ㅣ 예배의 전톤적 관례들을 통해서 나타난 과오와 약점들을 오늘에 재 조정하여 봄으로써, 오늘의 교회 예배 생횔에 생명력을 불어 넣는 장접들이 우지되고, 약점들이 고쳐질 수 있다고 사료됩니다. 따라서 이 장에서 성경을 통해서 본 예배의 역사로부터 시작하여 현대의 예배의 역사로부터 시작하여 현대의 예배까지 그 발달관정과 특색을 살펴 보고자 한다.
 1). 구약시대의 예배:
  구약에서의 하나님 백성의 예배는 이교(異敎)의 예배와 커다란 차이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한 백성에게 자신을 계시하여 자기를 섬기도록 그들을 선택하신 사실입니다.  드보스(Roland de Vaux)는 이스라엘의 예배를 다음과 같이 동양 제의(祭儀)와 구별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한분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는 역사 안에 개입하시는 인격적인 하나님이셨습니다. 이스라엘은 그 예배에서 아무런 형상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라이트(G. Ernest Wright) 역시 이스라엘의 예배를 다신론적 종교의 예배와 구별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신앙에서 예배의 기초는 역사적 개념과 영적인 사귐에 놓여 있습니다").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에 놓인 이스라엘의 생활과 역사는 곧 예배의 행동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삶은 하나님의 영광에 초점을 두고 있었으므로 예배의 발전과정은 바로 이스라엘의 생활과 역사의 진전을 의미하는 것이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예배를 성막과 성전에서 거행하였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 가운데 계신다는 것을 으미하는 것으로서 구약에서의 예배가 가시적(可視的)으로 표현되고 있다는 것을 말하여 주는 것입니다(

출 25:8,22. 민 17:4). 구약에서 히브리인들의 예배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회복을 위하여 또는 회복된 관계를 계속 유지하기 위하여 크게 3가지 현태의 예배를 드렸습니다. 회개의 속죄제, 감사의 번제, 영교의 화목제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위한 예배 형태들 자체가 인간들의 창작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제정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속죄의 길도, 감사와 헌신의 길도, 화목과 영교의 길도 모두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방법들입니다. 즉, 구약 예배에서는 하나님께서 예배의 주도권을 잡고 있었으며, 하나님의 행동에 대한 응답으로 나타난 인간들의 행위는 이차적인 것이였습니다. 즉, 구약 시대의 예배 행위는 하나님의 방법을 신앙으로 받아 순종하는 것이었습니다.
  (1). 족장시대의 예배:
   족장시대의 예배는 주로 하나님께서 족장과 그 가정에 대해서 언약을 세운 개인 제단과 가정 제단이였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교회가 족장들의 가정이였습니다. 그리고 그 예배의 제단에는 희생의 제물이 중심이였습니다(창 15:9-10, 창 22:6-8). 이스라엘의 족당들은 예언자(창 18:19), 제사장, 왕으로 불리웠습니다. 구약시대의 하나님은 인격적인 하나님으로서 인간과 교제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처음부터 사람을 요구하셨고, 사람을 찾는데 솔선하셨습니다. 이에 인간은 예배로서 응답하셨으니, 제단의 건설과 장소 및 봉헌이 여기에 포함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마음에 있는 제단을 어디로 가든지 지니고 다녔다"고 칼빈 선생께서 지적하셨습니다.  그대로 족장들은 이동과 더불어 제단을 쌓았던 것입니다. 실례를 들어 세겜의 땅, 모리앗 산, 상수리 나무 밑에서 벧엘 동산, 헤브론의 마므레의 상수리 나무 밑, 모리아, 브엘세바 등에서 하나님께 제단을 쌓았던 것입니다(창 12:6-7, 33:18-28, 창 35:1-8. 수 24:1-31. 창 12:8. 창 13:18.

 창 22:2. 창 21:33, 창 26:25). 아브라함이 최초로 제단을 쌓고 예배를 드린 곳은 세겜 땅 상수리 나무 밑에서입니다. 거기서 하나님께서 먼저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이곳은 에덴 동산이래 처음으로 하나님께서 나타나셨던 곳이다. 하나님께서 나타나신 곳에서 예배를 드린 것으로서, 예배에 있어서 하나님 임재의 원리가 분명한 것이다. 이 "세겜"에서 아브라함의 아들,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마리아의 여인에게 이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아버지를 예배할 때가 온다고 말하면서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 4:24).  이삭은 자기 아버지 아브라함으로부터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는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창 26:24-25). 또한 야곱은 하늘에 닿은 사닥다리위를 오르락 내리락하는 천사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신 꿈을 꾸었습니다. 아침에 그는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 두렵도다 이곳이여 다른 곳이 아니라 이는 하나님의 전이요"(창 28:16-17)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그곳에 돌로 단을 세우고 여호와께 예배드리며 그곳을 벧엘 곧(하나님의 집)이라고 불렀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자기를 찾으시는 자에게 오시고, 예배드리는 자의 마음속에 임재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없는 예배는 외식이고, 거짓이며, 인간만이 존재하는 인간적 집단에 불과합니다.  반면에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예배는 생명이 넘치고, 진리에 가득차 신적인 분위기에 넘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곳은 장소가 크든 작든, 사람이 많든 적든 간에 항상 참된 예배가 존재합니다.   구약시대의 예배장소는 성막(면회하는 집)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이 성막에 임재하시고, 그의 백성과 만나는 곳이라는 의미로 그렇게 불렀던 것입니다(시 42:1-4).  또한 성막의 구조는 하나님과 성소에서 만난다는 진리를 가시적(可視的)으로 표현하고 있는

데, 성막은 성소와 지성소로 되어있고, 그 사이에는 휘장이 가리워져 있었습니다(히 9:1-8, 출 25:10-40).   지성소에는 법궤가 있고 그곳은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 지성소에서는 1년에 단 한번 속죄일에 대제사장이 들어가는데 그는 그곳에서 자신의 죄와 백성들의 죄의 속죄받기 위하여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입니다. 성소는 제사장이 백성들을 대신하여 제단에서 죄의 희생제를 드리면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곳이었습니다. 향단(香壇)은 성소 안의 휘장에서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는데 , 제사장은 항상 향불이 꺼지지 않게 붕사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 향은 오늘 날 기도의 상징으로서 가장 순수한 예배 행위를 나타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은 희생의 제물(속죄를 뜻함)을 드림이 없이는 하나님을 예배하거나 하나님 앞에 가까이 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예배 의식은 곧, 이스라엘 신앙의 전승이 되어 왔고, 또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표현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예배 의식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계시하셨고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응답을 요구하셨습니다.  구약시대의 ㅅ어막 안의 성소와 지성소가 휘장으로 나뉘인 것은, 하나님과 인간의 집으로 구별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이 성막 전체가 하나님이 거하시며 임재하시는 집이며, 인간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집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임재를 깨닫고 신뢰하며 하나님이 영광을 바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여기에 바로 기독교 예배의 본질이 있는 것입니다(시 15:1, 24:3, 20:4-6).  성막 또는 성전 예배의 규정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성취되었습니다(사 7:14, 마 1:21, 요 1:14). 하나님께서 성전 예배의 의식에서 그의 백성에게 보여 주고자 하시는 것은 구속의 역사였던 것입니다. 성막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속죄의 완성은 이룩되었고, 부활하심으로서 구약의 성막은 그 사명을 다 완수하고 끝난 것입니다(마 27:51).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참된 성전이 된 것입니다(막 14:58. 요 2:19-21).

  (2). 율법시대의 예배:
  율법시대에 있어서도 가족적 예배가 줄곳 존속되고 있었지만 공적 예배는 성소를 중심으로하여 영위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율법시대의 공적 예배의 특색은 다음과 같은 점들이 있을 것입니다. 첫째, 이스라엘은 성전 이외의 여하한 곳에서도 희생제물을 드리는 것이 허용되지 아니하였습니다.  둘째, 공적 예배가 극히 세부에 이르기까지 규정되어 있었습니다. 성전의 설비, 제사장의 예복, 희생제물의 종류와 방법 등, 이것은 이스라엘은 역시 어렸던 처지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셋째, 그것은 대리적, 유탁적이었습니다.  성전에서의 공동예배가 제사장과 에위 사람들이 백성의 대리로서 이것을 행하여 일반백성들을 참여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참여는 간접적이였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백성들이 공적 예배를 전면적으로 제자상에게 위탁하는 것이 허락된 것이 아니라 년 3회의 정해진 때에 이스라엘인이 12세 이상의 남자라야 모두 성소에 가서 주의 앞에 나가지 않으면 안되어 있었습니다(출 23:14-17).  그것은 유월절(무교절)과 맥추절과 수장절 이었습니다(출 12:1-51).

  (3). 포로 시대의 예배: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한 구약의 공적 예배는 바벨론의 포로이후에는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미 이스라엘의 12지파는 북이스라엘과 남이스라엘(유다)로 분열되어 있었는데, 바벨론 군대가 예루살렘을 침범하여 성전을 파괴하고 이스라엘의 백성들을 포로로 잡아가게 되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국 땅에 포로가 되어 이전에 성전에서 드리던 희생의 제물을 드릴 수 없게 되자 회당 예배가 시작되게 되었습니다.   바벨론 군대에 의하여 예루살렘이 함락되자 솔로몬 성전이 파괴되고, 예배의 중심지인 예루살렘으로부터 포로의 시대부터 예배의 형태가 새로운 형태로 변화되게 되었습니다. 즉 성전을 중심으로 공적인 예배를 드리던 백성들이 새로운 형태인 회당(Synagogue)이라는 곳에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회당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새로운 예배의 형태로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에서 귀환한 후에도 예루살렘에서 성전을 제건하고, 희생 제물을 원하는 성전 예배를 다시 거행하였으나, 회당 제도를 폐지하지 않고 성전 예배와 함께 병행하였던 것입니다(느 8:1-6).  회당은 예루살렘에도 많지만 흩어진 유대인들이 거주하는 모든 지역에는 그 지역 예배를 위한 특수한 회당이 있었습니다(행 6:9, 13:5, 14:1, 17:1). 특히 팔레스타인에는 회당이 전역에 산재하여 있었는데, 큰 도시들 -나사렛-과가버나움을 포함하여 -- 한 개 또는 그 이상의 회당을 가지고 있었습니다(마 14:54, 마 12:9).   그후 유대인이 국가적, 정치적, 독립을 상실한 후에도, 회당만은 율법을 중심한 유대의 종교적, 사상적 공동체가 되었으며, 교육과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2). 신약시대의 예배:
  구약시대에 하나님이 임재해 계신다고 하는 곳인 성전에서 행하여진 공적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이후에는 그리스도의 구속의 역사를 중심으로 한 예배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구속의 역사는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죽으심과 부활에 의하여 지배된 역사입니다. 브루너(P. Brunner)는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의 중심은 나사렛 예수로서의 하나님의 아들의 성육과 십자가의 부활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신약시대의 교회의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생활에서 충분하고도 완전한 예배의 생활을 보았으며,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 과거를 기념하고,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구속의 은총을 고백하는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 예배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종말적 의의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신약시대의 예배는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그의 재림 후에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는 모형으로 생각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예배는 종말론적 현상(eschatological phenomenon)이라 불리워졌으니, 과거를 현제로 효과적으로 만들뿐 아니라 미래의 예시와 메시야적 영광을 현재에서 효과적으로 만든다는 의미에서 구속의 역사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예배의 경축에서 하나님의 구속의 종말론적 성취를 보고, 종말론적 교회로서의 자신을 알아차리고, 종말론적 완성의 소망을 갖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신약시대의 예배를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유대인 회당 예배의 영향이 대단히 컸습니다. 비록 회당 예배가 초대 교회 예배의 전부는 아니었으나, 예수님께서도 안식일에는 정규적으로 회당 예배에 참석하셨습니다(눅 4:16).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전통적 예배의 의식을 혁신하려 하지는 않았지만 그 의식에 생명력을 불러 일으키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의 여인과의 대화에서 가식적인 성전보다 성령을 중심에 모신 마음의 성전에 대한 예배를 말씀하셨습니다(고전 3:16).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한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지니라"(요 4:24)

고 말씀하신 것이 그 내용을 증거해 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유대인의 형식화된 의식 중심의 예배와 사마리아인의 말씀없는 자의적인 반대하여, 참 예배는 형식의 유무 보다 신학(神學)이 있어야 됨을 말씀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오순절로 시작된 공동체의 신약 시대 교회의 예배의 기초를 세우셨으니, 그 첫째는 성례전의 제정이고(마 28:19, 고전 11:23-29), 둘째는 십자가의 부활로 인하여 구약의 의식적 예배를 실제적으로 완전히 성취시킨 것입니다.  신약시대의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하나님의 전"(고전 3:16), "성령의 전"(고전 6:19), "하나님의 집"(딤전 3:15)등으로 불리워 졌는데, 교회에서 행하는 예배는 하나님의 성령을 통하여 임재하셔서 그의 백성과 교제하시고, 그의 백성은 예배에 임재하시는 하나님께 봉사한다는 영적 진리를 나타내고 있어 그런 의미로 볼 때 신약시대의 예배느 구약 시대의 성전 예배와 동일한 영적 진리를 갖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도 이 영적 진리는 그대로 맥락을 이어와, 하나님은 예배에 있어서 하나님의백성 가운데 임재하시고, 하나님의 백성은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하나님과 만나게 되어 하나님 나라의 축복을 예배를 통하여 체험할 수 있게 된다는 사상이 지배적이었습니다. 더 나아가서 교회는 하나님이 예배 행위 중에 성령을 통하여 그의 백성과 교제하는 곳이기에 교회가 바로 천국 즉, 하나님의 나라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사상은 우리가 장차갈 천국은 계시록 21장 3절에서 4절에 나타나 있지만 그러한 천국도 하나님과 인간이 같이 거하는 곳이므로 오늘 이시간에도 예배중에서와 거리를 걸어가는 도중에나 가정에서나 직장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곳은 어디든지 그곳이 하나님의 나라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내가 소유한다는 의미로서 현제적인 천국의 소유자가 되지 못하고서는 미래에 오는 천국을 소유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현제의 천국을 소유할 수 있

어야 합니다.  예배에 있어서 하나님의 임재는 특별 계시에 의한 임재인데, 이는 그리스도의 임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임재는 성령과 말씀에 의한 임재로서 그것은 말씀의 설교와 성찬식에 의하여 가장 분명하게 잘 표현되고 있습니다.
1). 예수님 시대의 예배:
  예수님 시대에는 공적 예배가 회당에서 시행됨과 동시에 성전에서도 병행되어 거행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지상생활을 하시는 동안, 새로운 예배 양식을 만들어 내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날마다 가르치셧고, 동시에 회당의 안식일 예배에서도 참석하시어 설교하셨습니다(막 14:49, 눅 4:16). 예수님께서는 회당 예배의 정통성을 인정하셨습니다. 그리고 보통 유대인처럼 절기에 성전 예배에도 참석하셨습니다(눅 2:23, 41. 요 7:14). 그러나 그 외에도 예수님께서는 직접 제자들에게 다락방 예배도 행하셨습니다. 그 예배를 통하여, 떡을 뗌으로 주님께서 행하신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하셨으며,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는 예식, 즉 주님이 예배자와 함께 계심을 느끼게 하는 그런 예식이 그 예배에서 첨가 되었습니다. 예수님 시대의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오순절을 깃점으로 신약 시대 교회의 예배 기초를 다음과 같이 이루어 놓으셨다는 점입니다. 첫째, 예수님께서는 구약의 의식적 예배의 폐지와 함께 영적 예배의 도래를 선언 하셨습니다(요 4:24).  둘째, 신약의 2대 예식인 성차 예식과 세례식을 제정하셨습니다(마 26:26-29, 고전 11:23-29. 마 28:19).  셋째, 예수님께서는 자기 자신의 죽음과 부활로써 구약의 의식적 예배를 실제로 성취하신 것입니다.

2). 사도시대의 예배:
  신약시대는 오순절에 시작된 것이지만 구약보다 신약적 예배에의 이행(移行)이 점진적이었습니다.  처음에는 기독교인은 계속하여 성전과 회당에서 드리는 예배에 참석하였습니다(행 2:46, 5:42, 눅 24:53). 그들이 성전에서 희생의 제물을 드렸는지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서 그들의 이해와 관계시켜 중요한 문제로 남았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이 성전의 희생제물을 드리는 예배에 출석하였는지는 성경에서 말하고 있지 않지만 사도행전에서 관계를 찾아본다면 사도행전 3장 1절의 "오후 3시 기도시간에 성전에 올라갔다"고 한 것이 있습니다. 오후 3시는 저녁 때입니다(왕상 18:29,36). 그러나 제자들이 희생제물을 드리는 예배에 차석한 것이 아니고, 그때 성전 뜰에서 시행된 회당풍의 예배에 회집되었던 것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새로 출범한 기독교 교회가 유대적 공적 예배에서 완전히 제외된 것이라면 저들이 모든 교회들에게 호감을 얻지 못했을 것입니다(행 2:43).  사도 바울 자신도 할 수 있는한 유대 법률을 지키고자 했었습니다(행 20:16, 고전 16:8). 또한 유대의 회당을 많이 사용하여 복음을 전파하고 있는 것 등으로 보아도 그 사실이 명백합니다(행 9:20).  그리고 기독교인들이 자기의 독자적인 회당을 조직한 것이 아니겠느냐는 것을 야고보서에 "당신들의 회당"이라는 말에서 그 의미를 찾으려고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이와 같이 사도 시대의 기독교인들이 성전의 마당과 회당에서 행하여지고 있는 유대적 공적 예배에 참석하고 있었지만 이것과 평행하여 독자적인 기독교적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사도들이 성전 특히 솔로몬 행각에서 설교를 중심한 공적 예배를 드렸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약 2:2, 행 3:11-26, 5:12-13). 그것과 더불어 "집"에서도 매일 예배를 드리고 있어 기도와 애찬을 나누었습니다(행 2:46).  사도행전 2장 46절과 5장 42절에 있는 "집"이란 단수로도 생각할 수 있고

또한 "집들"이라는 복수로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단수에 경우에는 예루살렘의 이층 다락방을 가리키고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행 12:12). 복수로 생각한다면 문법적으로는 가능하겠지만 신약의 몇구절의 내용을 보면 도리어 단수로 생각하는 편이 더욱 정확할 것입니다(롬 15:5, 고전 16:19, 골 4:15, 빌 1:2). 예루살렘 이외의 경우에는 개인의 가정이나 기타 장소가 사용되었습니다(행 19:9, 20:8).  사도시대의 교회 예배의 내용이 비교적 자세하게 기록된 곳은 고린도서입니다.  고린도전서에 보면 두 가지의 예배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 첫째는 비교적 개방적이고 비형식적인 전도적 성격의 것으로서 불신자들도 여기에 참석하였고, 그 집회 중에 회개운동이 전개 되었습니다(고전 14:23-25). 이것은 오늘날 말하고 있는 전도 집회와 근사한 것으로 생각이 되어 집니다. 이 집회는 대중적으로 인도하는 지도자가 인도한다는 것보다 도리어 자우스러운 집회로서 남자의 회중에서 한 회원이 성령님의 인도하심대로 말하면서 시행되는 것을 뜻했습니다(고전 14:33, 34). 부녀들에게 말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다는 것은 고린도 교회에서의 특별한 현상이 아니고, 다른 교회에서도 통하고 있는 일반적인 현상이였습니다(고전 14:34). 그 예배 방법은 주로 회당에서의 형식을 취한 기도, 찬미, 교수, 예언, 방언 등을 포함한 것과 축도로서 폐회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도행전에서 많은 부분들이 그것을 기도로 이루어 가는 것을 발견한 수가 있습니다(행 1:24, 4:24-31). 찬미에 대해서는 마리아의 찬송, 사가리아의 찬송 그리고 디모데전서에서와 요한 계시록의 내용들은 집회에서 사용되는 찬미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눅 1:46-55, 68-79, 딤전 3:16, 계 5:9-13, 12:10-12, 19:1-2, 19:6-8).  또한 가르치는 것이 있었습니다. 가르침이란 건덕을 위하여 시행되고 있는 말씀의 강해입니다(고전 2:7). 예언과 방언이란 사도시대의 특유한 토자연

적인 활동으로 성령의 선물 '가리스마' 또는 '푸뉴마티카'(             )라 칭한다(고전 12:4, 31, 12:1, 14:1). 예언 '아포칼룹시스'(               )는 성령에 의하여 계시를 말하는 것으로 고린도 교회에서는 많은 예언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한 번에 한 사람이 말하게 하고 있습니다(고전 14:29-33).  방언인 '글로싸'(           )에 대해서는 신약성경의 언급이 복음서에서 1회, 사도행전에서 3회 이외에는 전부 고린도전서에 있습니다(막 16:17, 행 2:4, 10:46-47, 19:6. 고전 12장-14장).  방언이 무엇인가라고 하는 문제에 여러 가지 견해를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방언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논한다면 첫째, 외국어를 수학하지 않았던 사람이 그 외국어로 말하는 것을 말합니다(Allport, Hodge, Lensky). 둘째, 실제적이지 않는 언어로 말하는 것을 말합니다(Grosheide, Moffet, Morris). 그러나 중요한 것은 어떤 것이든지 대중앞에 하는 방언은 해석되지 않으면 않된다는 것입니다(고전 14:26). 카리스마가 어느 때 행하여 졌는지는 명확하게 결정할 수는 없지만 그것은 특별계시가 종결된 그 때에 소멸된 것입니다. 또 다른 하나의 예배는 통상적으로 밤중에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지참한 각자의 식사들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이것은 제자들이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일치된 교제를 하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고전 11:23-34).  아침예배에 있어서 카리스마가 남용됨으로써 부패해지게 되었습니다. 저녁 예배이 애찬에도 점차적으로 부자와 가난한 집과의 차별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부한 사람들과 가난한 사라들이 별도로 회집하여, 어떤 사람들은 포식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굶주리는 일이 일어나게 되어 모두 함께하는 애찬을 중지하고 음식은 각자의 가정에서 먹게하며 교회에서는 주의 만찬만 참여 하도록 했씁니다.  그래서 제일 형태의 예배는 회당에서 온 것이고, 제이

형태의 예배는 기독교인들 독자적으로 개발된 형태였습니다. 결국 그 두가지가 합쳐져서 기독교 예배의 모형이 생긴 것입니다.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 모일 때 성도들의 언어와 행동으로 성도들이 존경과 경배의 표현을 외부에 나타나게 함으로서 예배가 이루어 진 것입니다(William Maxwell, Outline of Christian Worship, p.1.).  예배드리는 표현의 말고 행동은 다음 두가지의 뜻에 의하여 지배됩니다. 첫째, 우리들이 예배드리는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지식과, 둘째, 하나님께 예배 드리기에 가능케하는 이간의 근원등입니다.   기독교의 예배는 타종교의 예배와 뚜렷하게 구별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살아계신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께 향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기독교 예배의 발전은 오순절부터 성령께서 강림하시사 교회의 안팎에 계셔서 우리들을 인도하시기 때문에 기독교 예배는 성령님께서 인도하는 예배인 것입니다.  매우 훌륭하게 발달된 초대교회의 예배에 대한 기록이 신약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초대교회의 예배에 대한 전모가 사도행전과 서신서와 계시록에 보다 더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배는 찬송으로 시작되어 기도를 드리는 중에 성경을 읽고 성경을 주해하는 것이 기독교 예배의 근본적 요소였습니다. 이것은 유대회당에서 직접적으로 물려 받은 유산입니다. 예수님 자신도 이 관습을 따라 회당에서 예배를 드리렸습니다. 또한 사도 바울 자신도 그렇게 했습니다.  회당은 헬라어로 쉬나고게(            )에서 온 말인데, 이 말의 뜻은 '회집하는 집'(house of assemble) 또는 '모이는 곳'입니다.  이 회당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낭독되었고 설교가 공적 예배의 중심적 예배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신약시대의 공적 예배의 형태를 준비시키시는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이였습니다. 성전이 기독교 교회 예배의 발전에 강력한 영향을 미치지 못한 반면, 회당은 평범한 건물 및 단순한 의식으로 기독교의 관례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

다.  기독교의 예배는 회당의 규례와 다락방의 예식에 따르는 것입니다. 곧 기독교 교회의 예배 의식은 이 두 곳에서의 예식에 기초를 이룬 것입니다. 즉 초대교회의 예배에 있어서 이 두 가지 요소는 불가분리하게 연합되었던 것을 사도행전은 명확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행 2:42), "안식 후 첫 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튼날 떠나고자 하여 저희에게 강론할새"(행 20:7)라고 하였습니다. 즉 매주일에 예배를 위하여 모인 그리스도인들의 회합은 성찬식이었씁니다. 여기서 기도와 찬미와 의에 관한 교훈이 주의 만찬(Lord's Supper)이라는 비의적(秘義的) 교제와 불가분리적으로 연합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고린도전서 11장에서 이러한 것이 확실히 고린도교회에서의 실제적 관습이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떡을 떼는 일'은 그 당시에는 공동식사 곧, 애찬의 부분이였으나, 이 애찬은 얼마 안가서 정식 성찬식으로부터 분리 되었고, 결국은 교회 생활로부터 자취를 감추었고 다만 성찬식만 남게 되었습니다. 멕스웰(Maxwell)은 "이리하여 기독교회의 예배는 그리스도인의 경험의 도가니 안에서 회당과 다락방이 용해융합되어 하나의 특수하고 고유한 형태로 나타났던 것이다. 그리하여 서로를 보충하고 일깨워 가면서 용해되고 융합된 이 예배는 기독교회 예배의 규범이 되었다. 기독교회 예배는 다른 표현의 형태들(other forms expression)로 나타나 있으니 그것들은 주변에 속한 것이지 결코 중심에 속한 것은 아니다. 교회의 전형적 예배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회당 예배와 다락방에서의 경험과의 연합 속에서 발견 될 수 있으며 이 연합은 신약시대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라고 하였습니다(W. D. Maxwell, op. cit., pp.4-5).  성전에서 드리는 제사가 기독교 교회에 물려준 것이 적었습니다. 그 이유는 첫째, 이산된 유대 백성들의 대부분은 성전에서 예배를 드리는 경우

가 적었습니다. 심지어 팔레스틴에서도 주님 당시에 예배를 드리는 집은 회당이였습니다. 더욱이 이방의 기독교인들은 성전에서 본적이 없기 때문에 성전 예배의 의식이 적었습니다.  둘째, 주님의 십자가이후 40년에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었고 남아있는 것은 회당이였습니다.  그리고 회당의 기원은 명확하지 않지만 백성이 사방에 흩어져 있을 때 그 수가 많아졌습니다(Oestorley and Robinson, 'Hebrew Religion' 1930, p.212). 회당이 시작된 중요한 요소가 요시야(Josiah)의 종교개혁 때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회당의 기본적 목적은 율법을 읽는 것을 듣게하고 설명하는데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예배의 중심적인 것은 히브리어 성경을 읽고 다음에 다른 나라 말로 설명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중심으로 하여 찬송과 기도를 하는 것을 빼놓지 않았습니다.  찬송은 주로 옛 시편을 사용하였고 때로는 시도 섞어 사용하였습니다. 즉 시편, 선지서였습니다. 기독교의 이 모든 것은 유대교에서 물려 받은 것들입니다. 이때에 더욱 많이 관심을 가지고 읽고 있었던 책은 율법서 보다 선지서였습니다.  초대교회가 물려받은 예배의 요소는 역사적으로 오래 사용되고 있는 주기도문과 다락방에서 시행한 성만찬 예식입니다.
지금부터 회당의 운영과 예배순서를 더 깊이있게 연구하도록 하겠습니다.  회당은 장로들로 구성된 장로회(長老會)에 의해 통치되었고 운영되었습니다(눅 7:3-5). 장로회에서는 회당장을 선출하였는데, 회당장은 예배를 사회하고 때때로 자신이 설교도 하였습니다. 그는 또한 적당한 인물에게 기도와 성경낭독, 권면 등의 순서를 맡기기도 하였습니다(행 13:14-15). 회당장은 회당의 활동을 관리하고, 예배를 주관하며 교육을 담당하였고, 가난한 자를 위하여 구제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설교를 하지 아니할 때에는 설교자를 따로 결정하였습니다(행 13:5). 그외에도 그는 회당을 관리하면서, 회당에 랍비를 두어 설교하고 권면하는 일을 맡기기도

하였습니다. 회당에는 사람들이 안식일마다 모여 공적 예배를 계속하였고(행 15:21), 또한 안식일이후 둘째날과 다섯째 되는 날에는 사람들이 율법을 듣기 위하여 회당으로 모여들었습니다.  그리고 10인 이하의 회중이 있을 때는 기도처소가 따로 마련되어 있었습니다(행 16:16). 주로 안식일날 회당 예배 순서는 이렇게 이루어 집니다. 첫째, 쉐마(Shema) 낭독이 있었습니다. 쉐마란 '듣는다'(hear)라는 기도의 어귀에서 유래되었는데, 이것은 신명가와 민수기에 있는 성구들을 합하여 만든 것입니다.  공적 예배를 실시할 때 사회자가 쉐마를 낭독하면 예배 참석자는 그것을 듣게 됩니다. 둘째, 기도입니다. 기도는 제 18의 축복기도(Shemone Esre)와 축도의 전부 또는 일부가 행하여 졌습니다. 회중은 기립하여 있었고 각 축복기도가 있은 후에 아멘을 제창하였습니다(마 6:5). 셋째, 율법의 낭독입니다. 율법 공파의 낭독은 안식일만다 있었습니다(행 15:21). 이것은 감사의 기도로서 낭독을 시작하였고, 또 기도로 낭독을 마쳤습니다. 넷째, 구약의 예언서를 낭독하였습니다. 다섯째, 강해와 권면이 있었습니다. 성경에 대한 강해와 회중을 향한 권면이 있었습니다(행 13:15-16. 눅 4:16-22). 여섯째, 축도가 있었습니다. 제사장이 있는 회당에서는 축도를 하였고, 축도가 끝나면 회중들은 아멘으로 폐회하였습니다.   찬미가 예배의 일부였습니다. 그러나 유대인의 종교생활에서 차지하는 음악의 위치와 후에 기독교 공적 예배의 예를 감안하여 볼 때 회당 예배에도 찬미가 전연 없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시편과 아론의 축복 기도를 노래로 하였다고 주장하기도 하나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예배에 대한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회당 예배의 내용입니다. 첫째, 성경강해 입니다(딤전 4:13, 살전 5:27, 롬 4:14). 둘째, 시편과 찬송입니다(고전 14:26, 엡 5:19, 골 4:14). 셋째, 일반 기도

문입니다(행 2:42, 딤전 2:1-2). 넷째, 백성의 아멘 소리 입니다(應答: 고전 14:6). 다섯째, 설교 강해입니다(고전 14:26, 행 20:7). 여섯째, 신앙고백입니다(고전 15:1-4, 딤전 6:12). 그러나 신조의 형식적 반복이 필요 없었습니다.  일곱째, 구호사업입니다(고후 16:1-21, 고후 2:1-13, 롬 15:26) 등이 있습니다. 그리고 성찬식이 있습니다. 첫째, 마가 다락방에 따라서입니다(고전 10:16, 마 11:22, 막 26:26-28, 눅 14:22, 22:19-20). 둘째, 감사의 뜻이 포함된 헌신기도가 있습니다(눅 22:12, 고전 11:28, 고전 14:16, 딤전 2:1). 셋째,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의 기념이 있습니다(행 2:42, 눅 22:19, 고전 11:23, 25, 26). 넷째, 기도가 있습니다(요 17:1-20). 다섯째, 주기도문 반복이 있습니다(마 6:19-13, 눅 11:2-4). 여섯째, 찬송과 화평한 중에 친교가 있습니다(롬 16:16, 고전 16:20, 살전 5:26, 벧전 5:14). 일곱째, 여자와 남자를 분리하였습니다. 남자는 빈손이였지만, 여자는 머리에 보자기를 썼습니다(고전 11:6-7). 여덟째, 기도는 서서 했습니다(빌 1:27, 엡 6:14, 딤전 2:8).
 다음은 회당의 건물과 성전 예배의 차이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회당건물은 성전과 같이 장엄하고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각 고을의 경제적 형편에 따라서 성의껏 지었습니다. 그리하여 회당 안의 기둥에는 장식을 하였고, 일곱 촛대를 세웠으며, 포도나무 가지나 잎 등을 조각하기도 하였습니다. 강단 가운데는 임시 법궤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그 속에는 율법과 선지자의 교훈이 기록된 두루마리가 들어 있었습니다. 이 임시 법궤는 성전의 지성소의 법궤를 상징하였으며 그 법궤 대신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또한 성전 예배와 회당 예배의 차이점도 적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근본적 차이는 제물 문제였습니다. 성전 예배의 가장 중

요한 문제는 제물을 드리는 것이였습니다.  감사와 헌신의 번제를 드렸고, 인간과 하나님 또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화목을 위한 화목제물을 드렸으며, 하나님께 나아가 죄를 용서 받으려는 대속제물도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특히 하나님을 거역하여 죄인이 되었던 인간들이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드리는 대속죄가 가장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성전 예배는 근본적으로 제물에 대한 겻을 강조하였던 것입니다. 이에 비하여 회당 예배는 일상 생활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순종하도록 하기 위하여 성경을 공부하는 일을 강조하였습니다. 회당 예배는 성전이 파괴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게 됨으로서 성전 예배 대용으로 시작 되었기에, 제물없는 예배를 체득하게 되었고, 그것을 통하여 선지자의 교훈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회당에서는 교훈적 또는 교육적 요소가 첫째였고, 회당 예배는 성전 예배에 비하여 덜 형식적이였습니다. 교사는 회당에서 중요한 인물이였고, 제사장의 기능은 성전 예배에서 보다 그 존재가 미약했으며, 평신도의 참여가 더 뚜력하였습니다.  

제 4 장: 교회사를 통해서 본 예배
1. 속사도 시대의 예배:
  이 시대에 중요한 근거는 주후 140년까지는 고린도에 보내는 그레멘트의 로마에서의 편지였습니다(A.D 96). 또한  핀스(Pning's)의 편지로서(A.D. 112) 통치자 트라얀(Trajan)과 관리들에게 보내는 것이었습니다. ㅣ그리고 디다케(Didache. A.D. 130-140)로서 희랍어로 기록된 교제 3장 231페이지에 있습니다. 일자가 정확하지 않더라도 속사도시대 예배에 대하여 잘 기술되어 있습니다.  키뒷쉬(Kiddush)는 원칙적으로 성만찬(Eucharist)다음에 행해지는 애찬을 말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간단하게 합니다. 수요일과 금요일로 지키는 것이 서술되어 있습니다. 이때마다 죄를 고백하게 하여 청결케 하고 감사를 드리게 하면서 떡을 떼게 하였습니다. 단 주일 예배시에는 성찬 예식을 고정시켜 놓았습니다.  성찬은 주일마다 시행하여기념하였습니다.  유월절에는 연중행사이지만 주간에는 아니였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키뒷쉬(Kiddush)는 주간행사가 아니였습니다. 초대교회는 키뒷쉬(Kiddush)와 최후만찬이 있었습니다.  최후 성만찬의 시작을 존증하여 본다면 과거 유대민족이 잊을 수 없는 유월절의 기념을 하기 위하여 모여, 밤에 행하는 예식입니다. 성찬의 의미는 유월절의 뜻이 내포된 것입니다.  애찬은 전에 있었던 일을 주기적으로 기념하는 일을 다시 관찰하는 뜻이 있습니다(Ibid,. pp. 6-7).  특히 메시야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최후 만찬의 기원이 여기 있었던 것입니다.  유월절을 엄밀하게 말하면 가정적 의의가 있습니다. 애찬은 항상 남자들이 관찬하는 것이였습니다. 어린 양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였습니다.  떡(하르토스     )은 항상 키뒷쉬 흐름에 되돌아가게 했습니다.  즉 순교자 저스틴(Justin Martyr)은 광범위한 개요를 주었습니다(Jones, G. Wainwright, E; Yarnold.(ed)  "The S

tudy of Liturgy, p. 41).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때의 예배가 분명한 이념을 주고 있었습니다. 이 카톨릭은 바울이 죽은지 70년 후에 기록된 것입니다. 이 기록에서 보면 사도들이 실시한 것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던 것이 확실하였습니다.  그 첫째가 세례 예식후 성찬예식이 있었던 기술입니다.  그는 더욱이 떡과 잔을 받을 때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기념하는 것으로 받아야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가 말하는 것은 그 중심 의의를 떠나서 시행하는 것이 아닙을 덧붙인 것이었습니다.  그는 주일 예배시 거행하는 예식임을 서술하였습니다(Ibid., p.37.). 헌금은 주로 다른 이들을 도와 주기 위해서 해야 할 그 예식의 순서의 하나임을 알게 됨으로 2 세기에서부터 시행된 것임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하여간 2 세기 초엽의 예배는 성찬예식과 성경적 요소를 그대로 견지해 나아간 것이었습니다. 시와 찬미를 제처놓고 기도로만 두 가지 형식을 취하였습니다. 그것은 두 가지 형태를 설명할 수 있습니다. 즉 예배 시(Celebrant) 각각 역량대로 기도를 하는 것이였습니다. 모든 성도가 "아--멘"이라고 응답을 하는 것입니다.  예배 의식은 성전 단상에 서서 백성들에게 보이면서 그들을 인도하는 것이였습니다. 그때 헌신의 표시로 기도를 하였습니다. 사실은 2 세기가 아니고 터툴리안(Tertullian) 때부터 준비한 것으로 그것은 부활절 저녁에 뜻있게 시행된 것이였습니다.     

2. 교부시대의 예배:
  로마에 있어서의 제 2 세기 예배를 묘사한 한 서사문은 이 두 요소가 서로 혼합되어 있음을 보여주는데, 이것은 순교자 저스틴(Justin Martyr)이 안토니우스 피우스(Antoninus Pius, 약 140년경) 황제에게 보낸 첫 번째 변증서에서 나왔습니다(Justin Martyr, "First Apology", XV-LXVII) 즉 태양의 축일이라고 불리우는 날에 도시와 촌락에 사는 모든 사람들은 한 장소에 모여 사도들의 언행록이나 예언자들의 글을 시간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있었습니다. 그것이 끝나면 사회자가 낭독한 성경귀절 중에서 내포된 진리를 실천할 수 있도록 교훈하며 권면합니다. 그 후에 모두 기립하여 함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주로 기도가 끝나는 다음에 떡과 포도주와 물이 운반되었고, 사회자는 그의 능력에 따라 기도와 감사를 드리면 회중들은 모두 "아-멘"으로 외쳤습니다. 그리고 각 사람은 축복기도한 물질의 한 몫을 받아 나누며, 그것은 또한 집사들에 의하여 참석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도 분급되었습니다.  이 내용에서 기도와 성경 낭독과 교훈이 연합된 성찬식적인 예배(Eucharistic service)를 볼 수 있으며,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포도주의 의식에 있습니다. 멕스웰(Maxwell)이 지적했듯이 이 초기 예배에서 우리는 성례전적 요소와 성경적(Scriptural) 요소 사이에는 균형이 유지되고 있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즉 성경은 읽고 교훈하는 것과 떡과 포도주를 축성하고 수령하는 일은, 이 예배 의식의 불가불한 요소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중에 어느 한가지도 없어도 그것은 불완전한 것이었습니다. 이전 초대교회의 유동성 있는 예배로부터 동방과 서방교회의 특징 있는 예배 의식들이 발전되었습니다. 양 교회의 예배 의식의 기본적 구조는 동일 하였습니다. 즉 말씀과 성례전(word and sacrament)의 두 가지 기본요소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반면에 동방교회는 풍부한 상징적 요소를 가진 매우

정교한 의식의 성장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것은 보다간략하고 보다 직접적인 서방교회 의식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동방교회는 떡과 포도주의 준비를 그리스도의 수난의 내용을 면밀히 상징하는 성찬상의 의식으로 바꾸어 그것으로부터 예배를 시작함에 반하여, 서방 교회는 말씀의 예전으로부터 시작하는 본래의 순서를 그대로 지겼습니다(R.S. Franks, "Christian Worship in the Middle Ages", N. Michklom(ed), "Christian Worship. p.12).  성례식의 행위는 이코노스타시스(ikonostasis)라고 불리우는 휘장에 의하여 예배자들로부터 숨기어지고 그 문들은 다락방의 의식(성찬식)이 진행되는 동안 닫혀집니다. 여기에 휘장 중앙의 큰 문을 통하여 성소로 진행되는 동안 닫혀집니다. 여기에 휘장의 중앙의 큰 문을 통하여 성소로 들어가는 두 종류의 입당예식(ceremonial entrances)이 행하여지는데, 곧 말씀의 예식이 행하여질 때 성직자와 보조자가 복음서를 들고 들어가는 소성입(小聖入, little entrance)과 다락방의 예식(성찬식)때 성도들의 기도가 끝난 후 성찬상에 준비된 떡과 포도주가 주의 식탁으로 운반되는 대성입(大聖入, great entrance)입니다. 구원에 관해서는 양 교회간에 상반된 신학적 차이점이 있습니다. 동방교회의 입장에서는, 구원이란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통한 인간의 신격화이며 서방교회의 입장에서는, 그 구원이 십자가의 화목제사의 결과라고 봅니다. 따라서 동방교회의 성찬 예식은 교제와 행위인데 반하여 서방교회에서는 화목제사의 관념인 것이 지배적입니다. 동방교회에서의 예배에서는 헌물은 성례전에 사용되기 위하여 성령으로 성별된 예배자들의 예문임에 반하여, 미사에서는 그것을 축성된 후부터는 희생의 제물로 드리신 그리스도의 몸이요 피인 것입니다. 이러한 동방교회의 의식의 정교와 서방교회의 원시적 예배(primitive rite)에 대한 곡해와 함께 우리는 중세기에 있었던 동서 양 교회

에 있어서의 설교의 쇠퇴를 보게 되는데, 즉 성찬예배는 종종 전연 설교 없이 행하여 졌습니다. 그 결과로 본래 있었던 말씀과 성례전과의 균형이 상실되고 말았습니다.  동방교회에 있어서의 예배는 사실상 신비의식화 되었고, 서방교회에 있어서는 화체(transubstantiation)의 비적이 결정을 이루는 구경거리 연극으로 화해 버렸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프랭크스(Franks)가 상기시키듯이 "동방과 서방에 있어서의 중세 기독교 교회에 관하여 무엇보다도 먼저 고찰되어야 할 점은 성찬식(Eucharist)이 고대교회에 있어서의 마찬가지로 시종 기독교교회 예배의 기초이며 중심이 되고 있으며, 다른 모든 것들은 그것(성찬식)으로  돌아가고 또한 모든 것은 그것과 관련하여 해석되어져야 한다는 사실입니다"(Ibid.m p. 1109).  이 시대의 가장 중요한 증거는 알렉산드리아의 크레멘트(Clement, 220), 터툴리안(Tertullian, 240), 오리겐(Origen, 251)의 기록과 애굽의 감독인 트미우스(Thmius)의 사라피온(Srapion, 340)에 예속된 기도서와 예루살렘의 시릴(Cyril)의 요리문답 강해서입니다.  히포리투스(Hippolytus)의 교회 법전은 역시 흥미거리가 되는 증거들이 마련되어 있고 분리하여 토론된 것이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사라피온과 히포리투스(Sarapion and Hipploytus)가 제외한 모든 기록들과 헌신기도(신앙 간증기도)와 다락방의 의식이 취급되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비의성(秘義性. the secrecy)이 단기간이지만 저스틴(Justin)이 죽은 후부터 콘스탄틴(Constantine)까지 관찰하여 보면 그것은 훈련적 비의(disciplina arcani)로서 알려지고 있다.  예를 들면, 시프리아냐(Cyprian)은 잘 알려진 분으로서 신앙고백의 기도를 소개하는 예식서(Supsum corda)를 처음으로 저술하였다.  역시 우리가 알게 된 것은 예배를 시작할 때 성경을 읽어주는 인사의 취지의 내용으로 된

말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저희가 만날 때 말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은 하나님의 식구입니다. 그래서 사회자가 첫말로 이런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말에 이어 개회기도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기념의식은 단순하면서도 질서정연하였습니다. 기도는 일어서서 하거나 무릎을 꿇고 하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백성들이 주의 말을 들을 때 일어서는 것처럼 일어서는 것이 풍속이 되어 있었습니다. 말씀의 강해나 말씀 전달(講論)은 강대에서 행해졌습니다. 예물과 헌금은 헌금시간에 드리었습니다. 성찬예식에 있어서는 성찬의 떡을 떼고 잔을 들 때 교인들에게 본을 보여주기 위해서 제일 먼저 성직자가 들었고, 다음에 지도자들과 남자, 여자 등의 순으로 들게 했습니다. 성단 앞에 있는 성찬상에서 예식을 시행하였습니다.

3. 중세시대의 예배:
   초기 기독교 안에서 시작된 예배 의식과 신도들의 생활 양식은 로마 카톨릭 교회에 의해서 충분히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중세 시대의 로마 카톨릭 교회는 외적인 형식과 예식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중세시대는 미사(Mass)라는 예배 행위를 통하여 의식 중심, 예식 중심의 예배가 성행되었습니다. 이와같은 외적인 의식 중심, 예식 중심의 예배가 성행하게 된 것은 성례의식주의(Sacramentalism)와 성직주의(Sacerdotalism)의 신학적인 제도에 기인한 것이였습니다(W.P. Macwell, op. cit., p. 144.).  중세 시대의 예배는 신비 종교와 이방 종교의 어떤 관습과 의식을 첨가하여, 구약의 이전 제사 제도로 되돌아 간 느낌이었습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의 예배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본질적인 면을 보고 만지는 성찬의 예식에서ㅏ 찾고 음미하려는 일종의 감각적 호소 방식을 택함으로써 많은 미신이 생기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하였습니다.  5세기 경부터 종교 개혁이 일어날 때까지는 일정한 시간에, 고정된 예배 의식에 맞추어서 일정한 건물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강조 되었습니다.  여기서부터 미사(Mass)의 발전이 있게 되었습니다.
 (1). 미사(MASS): 미사는 로마 교회의 기본적인 예배 형태로서 신부가 집례하였으며, 구약의 성전 예배 형태를 변형시켜 행한 것입니다.  중세 시대의 미사는 인위적인 정교한 형식으로써 주님의 만찬을 행하는 하나의 의식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의식에는 수많은 성경읽기, 교독과 교창, 끝없는 기도문, 찬송 및 성자들의 기념 축자가 포함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의식을 거행하는 데는 수많은 책이 필요했습니다. 즉 시편, 교송성가(交誦聖歌), 찬송가, 성경, 특별 기조문의 책, 행렬성가 그리고 사회에 필요한 식례집(式例集), 서품 정식서(敍品 定式書), 성무 안내서(聖務 案內書)들이었습니다.  미사에 이와같은 거창하고 복잡한 의식이 포함된 것은 성

례전을 통하여 은혜가 내린다는 일종의 권위주의적(權威主義的)인 교회관에 근거한 것이었습니다. 6세기 경에 동,서 기독교회는 각기 자기네의 고유한 예배의식을 발전시켜 나갔습니다.  동방에서는 알렉산드리아식, 수리아식, 비쟌틴식으로 알려진 삼대 의식 유형이 있었고, 서방에서는 주로 갈리아와 로마의 예배식이 있었습니다. 동방 교회에서는 풍부한 의식을 사용한 정교한 예배 의식을 가지게 되었고, 서방 교회에서는 약간 간접적이고 간략한 예배 의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또한 성찬 예식도 강조점이 달라 동방 교회는 교제의 행위로 서방 교회에서는 화목제물의 개념으로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들 동. 서방 교회에서는 한가지 공통적인 현상이 있었으니 그것은 다름 아닌 강론 쇠퇴 내지는 강론 없는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중세시대의 예배 의식이 이처럼 동. 서방으로 갈라져 있었다고는 하나, 중세 시대를 대표하는 것은 역시 로마 카톨릭식이었습니다.  로마 카톨릭식의 예배 의식은 서방 전역을 지배하였을 뿐 아니라 중세 시대의 고정된 예배 순서의 본보기가 되었습니다.  이제 로마 카톨릭 교회의 예배 의식의 종류, 특징 및 폐단 등을 잠시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의 미사에는 정식 미사(Pontifical High Mass), 독창(讀唱) 미사(Low Mass), 미사 시카(Missa Sivva) 등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정식미사(Pontifical Mass)는 사교(司敎)가 한 사람 또는 그 이상의 신부(司祭)의 협조를 받아 사회를 보고 찬송을 드리는 미사였습니다.  이 정식 미사에는 사제가 드리는 미사말고 한 사제가 집사들의 협조를 받아 드리는 노래 부르는 미사(High Mass)가 있었는데, 이 미사는 성가 부분을 노래하는 잘 수련받은 찬양대가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독창미사(Low Mass)는 협조가나 성가대가 없이 한 사제가 거행하는 일반 미사였습니다.  제 6 세기 경에는 독창 미사가 일반 예배의식이 되었습니다.  또 미사 시카(Missa Sicca)

가 있는데 이것은 마른 미사(Dry Mass)라고도 부르고, 이것은 떡과 포도주의 헌납이 없고 성찬이 없는 독창 미사였습니다. 위의 대표적인 3가지 미사 외에도 많은 사적(私的)인 미사가 있었습니다. - 연옥에 있는 죽은 자들을 위한 미사, 비(雨)를 위한, 또는 좋은 날씨를 위한 미사 등 -- 수많은 미사가 있었습니다. 맥스웰(Maxwell)은 이것을 지적하여, "이러한 사적(私的)인 미사들이 교회의 영혼을 좀먹는 암이 되었다"과 하였습니다.   중세 시대의 미사는 라틴어로 거행되어 회중이 이해하지 못하였고, 회중은 자연 예배의 참여자라기 보다는 관람자격이 되었었습니다. 또한 성경은 개방되지 아니하고 사제들만 사용하였기 때문에 일반 회중은 사제의 강론에만 의지하는 형편이었습니다.  성경의 말씀은 자국어(自國語)로 되어 있지 않았고, 성도들의 생애와 전설의 일단(一端)이 성경의 말씀을 대신하였습니다.  예배는 신부와 소수의 성가대에 으히ㅏ여 라틴어로 진행되어 장엄한 분위기를 자아내며, 예배의 존엄성을 고창하게 하는 일변은 있었으나, 신자들의 일상적인 생활과는 거리가 먼 형편이였습니다.  더구나 16세기 경 로마 카톨릭 교회의 화체설(化體設)이 완성되고, 교회의 미사가 일정 불변하게 되자, 주의 만찬식은 미신과 뒤섞였고 회중은 일년에 한번 부활제 때만 참석하게 되어 교회의 미사는 신자들과 더욱 동떨어진 거리감을 주게 되었습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의 예배 의식에서는 분명히 몇가지 폐단이 있었습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의 유료(有料) 미사와 유료 면죄부(免罪符) 발행은 착취의 근원이 되었으며, 교회 내부에서 종교 개혁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또한 로마 교회의 미사는 화해적 성격을 강조하여 모든 종류의 악폐를 유발시켰습니다.  회중은 의식의 참여자이기 보다는 단순한 방관자가 되었고, 미사는 서로 맞지 않고 알기 어려운 서로 다른 출처에서 취한 기도들을 주워 모은 것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미사에는 성찬의 음식과 예배자들을 봉헌하시는 성령을 위한 기도가 없었

습니다. 미사는 죽은 말(死語)로 드려졌기 때문에 정적(靜的)이었으며, 이것은 무식한 회중 사이에 미신을 조장하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도마의 예배는 이상한 말로 드리기 때문에 참 예배의 필수적인 표적 가운데 하나인 덕성의 함양 -- 예배자들의 믿음을 세우는 것 -- 이 부적하다)라고 지적한 데이비스(Davies)의 말은 앞의 폐단을 단적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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