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목: 비교 종교학
교수: 이 상조목사

이번학기 학습 목표: 비교 종교학을 통하여 종교의 본질과 객관적인 의미에서의 종교의
                   정의를 알고 종교를 이루고 있는 요소와 종교에서 가장 중요한 삶과
                   죽음의 의미에 대하여 연구해 보려고 합니다. 짧은 시간에 종교의 모든
                   부분을 연구해 보는 것은 무리입니다. 그러나 종교를 이루는 기원과
                   종교를 나누는 방법과 종교의 개관을 통해서 기독교외의 다른 종교들을
                   연구해 봄으로서 기독교와 다른 종교의 비교를 통하여 우리가 궁극적
                   으로 목적을 두고 있는 비교 종교학을 연구해 보려고 합니다.   

 

비교 종교학( COMPARATIVE RELIGION )


*. 종교의 본질:
 1. "종교"라는 말의 어원: "종교"(宗敎)라는 말은 한문 글자대로 생각하면 '조종'(祖宗)되는 "교육"이라는 뜻입니다. 동양에서도 옛날부터 교육을 귀중히 여기는 사람으로 태어났을 지라도 교육을 받지 못하면 금수와 다를 것이 없다고 여겨왔습니다. 철학자 칸트는 교육이란 나무 그늘에서 인간으로 하여금 참인간이 되게 하는 열쇠가 숨겨져 있다고 갈파하였습니다. 교육이 이와같이 인간에게 필요하지만 교육중에서 종교가 가장 근본이요, 위대하고 숭고한 교육이란 의미에서 종교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종교라는 말이 서양에서 여러 가지 종교가 들어오면서부터 쓰기 시작하였는데 서양 말을 한문 글자 그대로 옮긴 것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종교를 서양에서는 여러 나라가 릴리젼(religion)이라고 쓰는데 이 말은 본래 라틴어에서 왔습니다. 라틴 말로 릴리기오(religio)에 대하여 두 가지의 해석이 있습니다. 로마의 철학자 키케로(Cicero, B.C. 106-43)는 "삼가 경의를 표한다"는 의미로 "relegere"에서 왔다고 하고 기독교 학자인 랙탄티우스(Lactantius, 2503-25)는 "다시 결합한다"는 의미인 "religare"에서 왔다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즉, 키케로는 사람이 자기보다 존엄한 존재에 대하여 조심하는 태도를 가조고 양심적으로 경의를 표하는 것이 종교라고 본 것이요, 랙탄티우스는 인생이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생명의 본원이 되는 신에게 떨어져 나와 죽게 되었는데 중보가 되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생명의 본원인 신에게 다시 결합하게 되는 것이 종교라고 본 것입니다.  그러면 키케로는 종교적 태도를 "경외"를 내세웠고, 랙탄티우스는 그리스도교의 교의를 머리에 두고 "생명의 구원"을 중심으로 하여 그 말을 해석한 것입니다. 프랑스의 언어학자 에르누(A.Ernout)와 메일레(A. Meillet, 1866-1936)는 어원로에 의하여 랙탄티우스의 해석이 정당하다고 단안을 내렸습니다.

 라틴 말을 모르는 사람으로도 그 말의 모음(母音) 관계를 보면 "religare"에서 왔다고 하는 랙탄티우스이 해석이 더 타당한 것처럼 보입니다.   라틴말에 "릴리기오"란 말은 지금 종교라고 하는 말보다 더 풍부한 의미를 가진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신에게 대한 사람의 의무와 교제하는 데 쓸 뿐만 아니라 그 의무를 봉행하며 교제하기 위한 여러 가지 준비까지 포함시켜 사용하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면 숭배의 대상을 결정하며 제사를 드리며 예배를 하는 일과 정신적으로 자기를 방성하며 신에게 기도하며 개인적 혹은 단체적으로 그 일에 종사하는 것을 다 "릴리기오"로 보았습니다.   그리스도교가 로마에 들어간 후에는, 특별히 4세기 초에 그 리스도교가 공인된 후에는 그리스도교에서 설교하며 예배보고 봉사하며 전도하는 모든 행동을 다 "릴리기오"로 여겼던 것입니다. 자세히 말하면 로마 사람이 재래에 믿어 오던 종교의 관념을 그리스도교에 옮기는 동시에 재래의 종교보다도 인간의 근본적 요구에서 생겨나는 자영ㄴ적 종교성을 좀더 깊게 하고, 좀더 높게하고, 좀더 깨끗하게 하는 완전한 종교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리스도교에 대하여 이렇게 집대성한 종교라는 신념을 가졌기 째문에 로마 사람은 그리스도교에 귀의한 후에는 다시 옛 종교로 돌아가지 않았던 것입니다.  랙탄티우스가 종교란 말을 "다시 결합한다"는 뜻으로 해석한 것은 그리스도교의 근본 교의를 나타낸 것으로 생각됩니다. "다시 결합한다"는 말은 실과나무의 접붙이는 것으로 생각하면 깨닫기 쉽습니다.   또 다른 면에서 그리스도교의 일부분을 보면 신에게 창조를 받는 모든 물건과 사람은 다 선하다라는 주장입니다. 루소(Rousseau, 1712-1778)의 교육소설 "에밀"의 첫머리에 "천연(天然)의 모든 물건은 다 선하다. 사람의 손이 가 닿는 곳에(人爲) 악이 생긴다"라고 한 말은 이것을 가리킨 것이다라고 봅니다. 즉 우리의 시조는 선하게 창조를 받았지만 그만 죄를 범하고 타락하여 자자손손 내려오면서 세상은 악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신의

 명령을 범하여 죄를 지은 인간은 생명의 본원이 되시는 신에게서 떨어져 나왔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가 세상에 나타날 그 모습대로 인간을 창조했다는 것입니다. 즉 사람의 모형은 그리스도였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타락하여 악하여 졌어도 원형이 되는 그리스도는 선한 모습 그대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는 만일 사람이 중생하지 못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랰탄티우스의 종교란 말에 대한 해석은 그리스도교의 교의에 적합하다는 것입니다.  

1. 종교의 정의?
  무슨 사물이든지 명사든지 거기 대하여 정의를 내리우기는 결코 쉬운일이 아닙니다. 사람은 무엇인가 용기란 무엇인가 하고 정의를 요구하여도 얼른 대답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종교와 같이 내용이 복잡하고 형태가 특수한 것을 정의하는 일은 더욱 그러합니다. 그러므로 많은 철학자들과 종교 연구가들이 종교는 무엇이라고 정의를 하였지만 실로 십인십색으로 정의가 각각 달라 무리궝에 매를 놓는 격으로 어느 정의를 붇잡아야 할지를 모를 지역인 것이 현실입니다. 이제 종교에 대하여 여러 가지로 분류하면서 크게 몇가지로 나누어 소개하겠습니다.
  1). 이지적 견지에서 내린 정의: 사람의 의식은 이지(理知)와 감정과 의지의 세 가지 방면으로 작용을 나타낸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보통 심리학자들의 설명입니다. 이지는 종교를 정의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이지가 없으면 무엇을 인식하고 처리할 방법을 강구할 수가 없고 감정이 없으면 무엇을 느끼고 열심을 낼 수가 없고 의지가 없으면 선택을 하고 결정을 지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종교 신앙에도 어떤 종교를 좋은 종교라고 인정하고 그 종교의 경전을 읽으며 교의를 배우며 예배 의식을 연습하는 것은 이지에 속하고, 죄를 미워하며 신을 경외하며 교조(敎祖)를 사랑하며 불쌍한 사람을 긍휼히 여기고 슬픈 사람을 위로하며 내세를 바라보고 받을 기업과 영원한 복을 기뻐하는 것은 다 감정이요, 죄악을 경계하고 선의를 선택하며 최선을 닿아여 죽기까지 봉사하는 것은 의지로 말미암아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종교신안에도 지, 정, 의, 세 방면의 작용이 없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종교의 정의를 내리는 데도 어느 한편으로 치우쳐 신앙은 이지적이라느니 감정적이라느니 의지적이라느니 또 지, 정, 의를 포괄하여 종교 신앙은 인격 전체에 돤한 것이라느니 여러 가지 입장에서 정의합니다. 주지주의(主知主義)적 견지에 있는 사람은 종교도 지적 견지에서 보게 되고, 주정주의(主情主義)적

 견지에 있는 철학자는 종교는 감정의 소산이라고 주장하고, 주의주의(主意主義)적 입장에서 무엇을 해석하는 사람은 종교도 의지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또, 지, 정, 의를 통과하여 인격적으로보려하는 사람도 있게 되는데 이지의대상은 진(眞)이요, 감정의 대상은 미(美)요, 의지의 대상은 선(善)이요, 인격의 대상은 성(聖)이라고 하는 것이 근년의 사가치설(四價値設)입니다. 보통으로 말하면 자연과학이나 철학은 진(眞)을 목표로하고 법률이나 도덕은 선(善)을 목표로하고, 미술이나 음악은 미(美)를 목표로하고, 종교는 성(聖)을 목표로 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종교의 신도들이 그들이 믿는 종교의 대상이나 교조에 대하여서는 이것이 진이요, 선이요, 미요, 성이라고 쳐다보고 찬미하는 곳에 신앙과 귀의가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종교는 첫째, 무한한 존재를 지각하는 것입니다. 이 무한의 지각은 집접적으로 인간의 덕성(德性)을 감화시킬 만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종교는 인간의 도덕적 품성을 바로잡아 줄 수 있는 표현으로서 무한을 지각하는 곳에 나타납니다. 우리가 만일 조용히 않아 귀를 기울이고 잘 듣는다면 모든 종교의 이면에서는 심령의 무엇을 사모하느라고 헐떡이는 숨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생각할 수 없는 이를 생각하느라고 애를 쓰는 탄식 소리와 무한한 이를 처다보고 사랑하는 속삭임이 들려올 것입니다(막스 뮬러). 둘째로, 종교는 완전한 이를 알고 신비한 이를 사랑하는 것입니다(스피노자). 셋째로, 종교에서 신에 대한 지식은 신에 대한 신앙에서 떨 수 없는 것이요, 신에 대한 사랑을 연습하고 발생하고 성장하여 신과 및 그 큰 길(道)을 사람들의 심성에 융합하게하고 그 속에서 활약하는 것은 종교입니다. 이와같이 실제의 수련을 버리고 말 때에는 종교가 그 목적을 잃어 버리고 맙니다(라이프나트). 넷째로, 신비라는 의식은 가장 미개한 시대의 서물숭배 사상에까지도 있었다고 할 수 있는데 이 신비를 알아보려고 하는 마음에서 종교는  일어난 것입니다(허버트 스펜서(Spencer

)). 다섯째로, 우리의 아는 것과 행하는 것,  두 가지 사이에 있는 가장 높은 조화의식(調和意識)을 종교라고 부릅니다(셀링. Schelling). 여섯 번째, 종교를 인가과 신 사이에 잇는 관계라고 한다면 인간의  의식 속에서 종교적 대상이 되는 신을 체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종교는 아무래도 의식적인 종교 현상에서 시작한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인간이란 주체가 신이란 객체를 교제함에는 반드시 어떤 모양으로든지 그 객체를 사상(寫像)함을 요합니다. 만인 신의 사상이 없으면 종교가 성립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상(寫像)은 의식적인 종교 기능의 출발점이 됩니다.  또 종교에서는 세계의 모든 난문제가 해결됩니다. 깊고 묘한 사상이 내리 드리웟던 휘장을 걷어 들고 끓어 올라오는 감정의 가라않는 곳이 종교입니다. 모든 인간의 상호 관계와 활동과 희열과 인간의 존종히 여기는 모든 것이 다 협조되는 곳이 종교입니다. 신을 의식하고 신을 논증하고 신을 연구하는 곳에 모든 것이 모여 와서 협조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신은 만유의 시작이요, 만유의 마지막이며, 만유의 통일이요, 만유의 중심입니다. 인간은 종교로 말미암아 이 우주의 중심과 연락하고 거기서 다시 위로 뛰어 올라가 최고 자유의 경역(境域)에 도달합니다(헤겔).  일곱 번째, 종교란 것은 인간이 신비한 정신을 세계 전체와 자기의 지배자오 인정하고 자기가 거기 합치하고자 하는 데서 생긴 인간의 구범입니다(레빌.Reville).  여덟 번째, 인간이 자기 감정에 영향을 줄 수 있는 형이상학적 개념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이것이 곧 종교의 신앙입니다.  어떤 사람이든지 자기의 종교적 요구를 만족시키ㅈ기 위하여 형이상학적 관념을 요구하는 것입니다(하르크만. Eduard Hartmann).  아홉 번째, 철학과 종교는 같은 문제를 다루는 것입니다. 둘 다 같이 형원한 가치의 세계를 마지막에는 같은 것이라고 지각하기 때문에 세ㅖ를 절대적으로 가치가 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철학은 경험을 예상하는 데까지 올

라가지만, 종교는 경험을 초월한데 까지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철학은 경험 세계를 밑받침해 주는 하층 건축이요, 종교는 경험 위에 건축한 상층 건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때문에 종교는 인격을 초월한 의식을 통하여서 되는 ㄱ지각의 형식입니다(뮌스터버그. Munsterberg).  열 번째, 종교를 역사적 또는 심리적 사실로 본다면 그것은 항상 형이상학적입니다. 종교는 언제든지 실제에 괗나 이지적 원리를 찾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종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 곧 실재의 세계와 인간의 경험을 결합시켜서 세계와 인간의 모든 사실을 설명하려 하는 것입니다(라드. Ladd).   

  2). 감정적 견지에서 내린 정의: 종교에서 느끼는 감정은 공포, 경외, 경건, 찬미, 감사, 희열, 신뢰, 자비, 긍휼 등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신의 공정하신 위엄예 대하여서는 공포심이 나고, 전능하신 권력에 대하여서는 경외심이 나고, 그 때끗하고 거룩하심에 대하여서는 경건한 태도를 가지지 않을 수가 없고, 그 영광에 대ㅐ서는 찬미하게 되고, 그 은혜에 대해서는 감사하게 되고, 허락하신 기업과 행복을 바라볼 때에는 기뻐하지 않을 수 없고, 그 끊임없는 사랑을 생각할 때에는 신뢰하지 않을 수 없고, 진리를 모르고 늘 죄악 가운데 헤매는 동포들을 생각할 때에는 자비와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솟아 나오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종교의 신앙이 다만 감정에 만 의존한다는 것은 맞는다고 말할 수 없지만, 신앙은 감정으로 말미암아 가장 잘  나타낸다고 할 수 있기 때문에 감정은 무지할 수 없는 것임이 분명합니다.  어떤 사람은 인간 의식에 있어서 이지(理智)가 가장 귀하고 감정과 같은 것은 연기 같이 가벼운 것이라고 생각하고 또 어떤 사람은 의지야말로 인격에 가까운 것이므로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주지주의자(主知主義者)에 속한 것입니다. 그 주장에도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인간의식에서 감정을 덜어 버린다면 사회는 마른 막대기나 흩어지는 모래알과 같으리라고 한 엔젤(Engel)이란 심리학자의 말이 과연 그러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가령 가정예서라도 웃음이 없고 기쁨이 없고 희망이 없고 사랑이 없고 감사가 없고 화평이 없다고 하면, 그런 가정은 냉랭하기 그지없고 단란하게 살 수가 없을 것입니다. 친자 간에 서로 믿고 서로 감사하며 서로 돕고 서로 사랑하는 곳에 행복이 임할 것이비낟. 부부 간에도 서로 믿고 서로 감사하며 서로 돕고 서로 사랑하는 곳에서 이상적 부부 생활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반면에 서로 원망하고 미워하며 서로 의심하고 반항하면 그 가정은 불원간에 파멸할 것입니다. 가정만 아니라 사회도 그러하고 교회도

그러하고 국가도 그러할 것입니 . 인간 의식예서 이지(理智)만 지나치게 발달하면 국오ㅓ지고 의지만이 너무 발달하면 질겨집니다. 감정도 과도하게 예민해지면 경망스러워지고 방탕하게 될 수 있기는 하지만 감정이 발달하지 않으면 인간 사회에 아무 윤택한 기분과 아름다운 덕성이 나타날 수 없습니다. 불교 경전에 "사람의 이지는 바윗돌 같아서 구더기는 하지만 망치로 때리면 깨어지고 만다. 그러나 감정은 연실과 같이 꺽어져도 끊어지지 않는다"라는 글귀가 있습니다. 친구 사이라도  지식이 부족하여 무슨 오해가 생겼다 하면 서로 마주 앉아 전은 이렇고 ㅎ는 이렇고 사연을 말하면 오해가 풀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에 감정이 상하여 피차에 "이놈 부자"하고 있으면 일생을 가도 풀리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식의 잘못된 것은 그 오해를 풀면 그뿐이지만 감정의 맺힌 것은 좁퍼럼 풀리기 어렵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종교의 신앙은 감정과 고나계가 많은 만큼 감정을 등한히 여겨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첫째, 종교는 그 자신이 본질적이 것이요, 또 주격적(主格的)인 것입니다. 종교는 결코 형이상학이나 자연과학이나 도덕에 의속해 있는 것이아니요, 아주 독자적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는 인간의식의 본질적이며 주격적인 감정에 뿌리를 깊이 박고 있는 것입니다. 감정 중에도 미약하여 무력한 감정이 아니요, 정신의 부활이요, 생명의 확장인 강렬한 감정에서 출발한 것입니다. 인간 의식의 현상적이요, 빈격적(賓格的)인 의지에 의존한 자연과학보다 인간에게 근본적 관계가 있는 것이 종교입니다. 다시 말하면 종교의 내용은 사상도 아니요, 행위도 아니요, 다만 유한한 인간의 영원한 이에게 대한 직관적, 감정적 관계인 것입니다. 그런즉 신앙은 인생이 신과 교제하는 절대적 귀의(歸依)이 생활을 가리키는 것으로 인간의 진리를 체득하는 가장 가까운 지름길입니다.  인간의 감정이 자기 자신과 우주에 공통적으로 있는 실재와 생명을 표현하는데 ㄱ 표현의 정도가 높으면 높을수록 인간의 감정은 더 경건하여

질 것입니다.  종교는 절대자에게 귀의하는 감정과 직관입니다. 좀저 자세히 말하면 종교는 어떤 사람들이 국가나 개인에게 이용되는 기계와 같이 생각하는 수가 있지만 그런 사람의 종교라고 하는 종교는 참 종교는 아닌 것입니다. 종교는 인간이 자기의 운명을 포함한 것이라고 느끼는 우주적 감정입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이 자기를 그 속에 포함시켜 이것은 영원 불멸하는 것이라고 발견하는 가장 높은 능력의 현재한 감정입니다. 종교는 본래 인간성의 자연적 발현으로 어떤 사람이든지 종교 의식을 지니고 있으며 또 그것이 진리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종교는 우주를 직관하는 것이므로 기도와 명상 가운데서 우주 자체의 표현과 행동을 엿보아 알려 하는 것입니다. 천진난만한 어린아이와 같이 온전한 수종적 태도로서 우주의 직접적인 감화와 영향에 접촉하여 가슴속에 가득히 받아들이는 것이 종교신앙입니다. 우주는 끊임없이 활동하는 것이므로 잠시 동안이라도 쉬지 않고 이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렇게 나타나는 여러 가지 형식을 통하여 우리가 다 측량할 수 없을 만큼 생활력을 풍부하게 나누어 줍니다.  그리하여 모든 사물을 성립하게 하고 존재하게 합니다. 계속하여 우리 앞에 나타나는 모든 사물은  다 우주가 우리에게 보여 주는 동작입니다. 그런데 이 우주의 모든 작용과 여러 가지 영향에 대하여 그 중 한 가지라도 단순하게 분리시키거나 독립시켜서 다루지 않고 또 그 낱낱의 제한있는 부분적인 것을 서로 대립시키거나 서로 모순된 것으로 보지 않고, 이 모든 것을 통일이 있는 전체의 각 부분으로 생각하며 유일무이한 무한 그 자체의 나타나는 유한의 부분으로 여겨, 우리 생활에 받아들여 그것과 융합하여 하나가 되고 이런 것 전부를 공평무사하게 우리 정신에서 활약시키는 것은 곧 종교입니다. 그러므로 종교는 정신적 활동의 극치입니다. 종교적 정서의 본질은 절대로 신뢰하고 귀의하는 감정에 의속합니다(슐라이에르마허).  둘째, 종교는 라틴 말에 릴리기오(religio)가 어원적으로 보여 주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이 인식으로서는 미치지 못하는 존재에 대하여 저절로 나오는 경외의 감정을 의미합니다(할리데이.Halyday). 셋째, 종교란 것은 무엇이든지 자기 이외의 것 가운데서 자기보다 우월한 존재에게 대하여 존경하며 자기는 그 힘의 지배 밑에 있는 줄로 믿고 그 존재를 접촉하며 갈망하는 데서 성립됩니다.  그러므로 종교의 현상을 정밀하게 분석하면 감사, 감격에 넘치는 심정에 도달합니다. 이와 같이 종교의 본질이 동경과 감사에 있기 때문에 종교인의 입에서는 찬송이 그치지 않아야 합니다(틸레.Tiele). 넷째, 어떤 종교를 신앙하든지 그 신앙에는 두 가지의 요소가 저절로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지식적 요소요, 또 하나는 감정적 요소입니다.  지식적 요소는 신앙의 대상을 구성하는 것이요, 감정적 요소는 행위를 통하여 지식적 요소를밖에 표시합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이 감정적 요소를 잘 발휘하지 못하면 종교적 신앙에 깊이 들어가지 못하고 다만 추상적으로 형이상학적 공허한 개념만을 가짐에 지나지 않습니다(리보.Ribot).  다섯째, 종교는 우리 인간과 우주 전체 사이에 조화가 있다고 하는 신념에 기초를 둔 감정입니다(맥태거트. McTaggart). 여섯째, 종교란 것은 신앙의 끈으로 인간을 신에게 결합시키는 것이다(플라이 테러. Pfleiderer).
  3). 의지적 견지에서 내린 정의:
  4). 인격적 견지에서 내린 정의:
2. 종교의 기원.
3. 종교의 요소.
4. 종교의 필연성.
5. 종교의 타당성.
* 종교의 분류
6. 고대 종교.
7. 현대 종교.
8. 세계 종교.
9. 불교의 세계
10.유교의 영향
11.유대교.
12.작은 종교들

 


4. 종교의 필연성: 자연과학자의 일부와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들의 대부분이 종교를 무시하고 모든 문화를 세속화하기에 노력한다.  그 결과는 모든 문화를 순전한 기계적, 기술적 방면으로 끌고 나가려 한다.  거기에는 아무런 숭고한 지도이념이 없고 또 아무런 일반적이요, 윤리적인 가치의 기초도 없고 다시 어떠한 통일이 있는 정신적 목표도 없다.  이와 같이 지도이념과 가치의 기초와 정신적 목표가 없는 문화는 말하자면 영혼이 없는 문명이다. 과거의 역사를 보고 장래 일을 생각한다면 이런 영혼이 없는 문명은 결코 건전하게 발달하지 못한다. 만일 오래 간다면 오래 갈수록 인류사회를 부패하게 하고 타락하게 하는 것이다.  독일의 철학자 피히테(Fichte, 1797-1879)는 도덕을 고조(高調)하면서 다음과 같은 의미의 말을 하였다.  유신논증(有神論證)에 대하여 옛날부터 내려오는 우주론적 논증이나 실체론(實體論)적 논증이나 목적론적 논증은 다 성립하지 못하더라고 칸트(Kant. 1924-1804)가 주장한 도덕론적 논증은 정당하다고 말할 만하다. 다시 말하면 역사적으로 유신 사상을 가지고 새활할 때와 무신사상을 가지고 생활할때를 비교해 보면 알 것이다. 개인생활이나 국가생활이나 무신사상과 종교 무시의 행동을 하고서 도덕적으로 더 향상되고 사회적으로 더 행복을 초래한 일은 없다는 것이다.  이 역사적, 도덕적 사실로서 신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 한 것이다. 독일 학자 슈타인부허(Steinbucher)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현대의 인류 생활은 역사의 종말이든지, 적어도 중대한 한 전환기임에는 틀림이 없다고 선언하는 지식층 사람의 외치는 소리가 점점 많아져 간다.  모든 재화(災禍)의 원인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요, 오로지 사회생활에서 종교를 덜어 버리려 함에 있다. 만일 종교가 사회의 생활 형태에서 떠나고 만다면 사회생활은 커다란 위험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다. 이것은 세계 역사에서 특별히 혁명적 위기에서 보는 바이다.  이것은 세계 역사에서

특별히 혁명적 위기에서 보는 바이다. 다시 말하면 종교의 위기는 인간 생활의 전기구(全機構)의 위기를 일으키는 것이다.  이 위기는 생활 전폭에 퍼지는 것이요, 인간적 실존의 밑뿌리에까지 파고들어 가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미국 의사로서 노벨상까지 받은 카렐(A. Carrel)은 사람의 신체 질병의 궁극적 원인을 깊이 고찰하였다.  연구한 결과는 영혼의 실조(失調)라는 데 도달하였다.  개인이든지 사회든지 정신 상태가 혼란해지고 도덕 상태가 조화를 잃으면 질병에 걸리지 않을 수가 없다.  다시 말하면 개인이나 사회나 그 생활의 참된 건강은 종교에 달렸다고 강조하였다.  카렐은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인류는 철학적 사색에서보다도 종교적 영감에서 훨씬 더 강렬하고 심각한 자극을 받는다. 옛날 도시공동체에 있어서는 종교는 가정에서나 사회에서나 생활의 기반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우리의 선조가 건축하던 대성당과 신전은 대부분 빈터만 남아 있는 것이 아닌가. 여행을 다니는 사람들도 박물학적 또는 고고학적으로 구경하고 말 셈이 아닌가. 그렇다고 해5서 현대인에게는 종교의식이 다 없어졌다거나 잠들었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높은 정신적 문화를ㄹ 지닌고 있는 사람이나 국민은 지금고 종교적 감정의 발현으로 영적 이상세계에 들어가려고 꾸준히 노력하고 있다.
  프랑스의 벤저민 콩스탕(Benjamin Constant)은 계몽운동에도 관계가 있었고 낭만주의(romanticism)에도 영향이 있지만 일생을 두고 독자적으로 종교사 연구에 헌신하였다. 콩스탕은, 종교적인 관습과 형태에는 불합리한 것이 많다고 해서 종교ㅕ를 비난한 볼테르(Voltaire, 1694-1778)에 대하여 반대하는 의사를 표시하였다.  종교에 불합리한 것이 있는 것과 같이 보이는 것은 결코 그것을 가지고 종교를 부정할 근거가 되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그것은 도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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